아이들의 방학을 맞아 여행을 가기로 했다.
늦은 밤, 아이들을 재우고 있는데 거실에 있는 남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서울 어때?
남편이 운전을 해야 하니 목적지를 직접 고르라고 했는데 서울을 가자고 했다.
| 서울 가면 어디 갈려고?
| 청와대. 롯데월드. 청계천. 한옥마을. 인사동...
| 별로 안 당기네... 날 좋을 때 가고 싶다. 따뜻할 때.
| 그럼 어디? 아니면 남이섬.
| 남이섬도 좋네.
| 레고랜드. 남이섬. 춘천. 막국수. 닭갈비...
| 자연을 보고 싶긴 해... 속초 갈까?
| 응, 괜찮아.
결국 강원도. 또 강원도.
나는 강원도를 참 좋아한다. 우리는 강원도를 참 좋아한다.
그렇게 갔어도 지겹지가 않다.
지난 며칠간 마음이 답답했다.
뭔지 잘 모르겠는 어딘가가 건드려진 거 같긴 한데
이유도 상황도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던 차였다.
쓰고 있던 [마음 깎기 2]도 아빠가 돌아가시고부터는 이상하게 쓸 수가 없었다. 써놓았던 글마저 마음이 가지 않았다.
아빠의 이야기를 함께 쓰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12월 안에 마음 깎기 2를 마무리 짓고 새해에는 새로운 걸 쓰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마무리를 지어야겠는데 쓸 수가 없으니 그 계획마저도 어려워졌다.
아픈 마음. 허전한 마음. 미안한 마음. 후련한 마음. 괴로운 마음. 편한 마음.
여러 모양의 마음들이 자꾸 들락날락했다.
그냥 너무도 떠나고만 싶었다.
회사일이 계획대로 끝맺어지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신경 쓰지 말라고 남편에게 쿨한 척 말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여행 갈 수 있을 거 같아? 라며 수도 없이 티 나게 물었다.
마침 하던 일이 마무리되고 그렇게 우리는 코앞에 날짜를 잡고 떠나왔다. 속초로.
7번 국도를 달리는 동안 오른쪽으로 펼쳐진 동해바다만 봐도 숨통이 트였다.
이따금씩 창문을 내려 찬공기도 들이마셨다.
겨울 강원도는 추워야 맛인데 따사롭다 느낄 만큼 햇살이 좋은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설렜다.
아이의 말처럼 바다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고 싶을 만큼.
온기가 가득한 차 안에서 쬐는 눈이 부시도록 따사로운 햇살은 계절을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겨울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더 시렸지만 그제서야 내가 속초에 있구나 싶었다
속초의 겨울바다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추웠다.
그럼에도 나를 닮은 것인지 늘 바다, 바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은 추운 줄도 모르고 모래사장을 돌아다녔다.
비둘기를 따라 걸어보기도 하고 모래 속에 숨은 조개껍데기를 줍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찬공기에 아이들의 손이 시릴까 봐 발끝으로 모래를 헤집어 조개껍데기를 찾는 걸 도왔다. 빨리 주울만큼 줍고 얼른 가려던 심산이었는데 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래밭에 주저앉아 껍질을 주워 담고 있었다. 다양한 모양의 조개를 찾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던 거다.
| 엄마 이것 좀 봐! 진짜 예쁘지 않아?
모래를 슥- 슥- 뒤집을 때마다 반짝하고 튀어나오는 조개껍데기가 마치 보물 같았달까. 나와 아이들은 조개가 나올 때마다 예쁘다~하며 감탄만 연발했다.
우리 손은 금세 벌겋게 얼었지만 두 주머니는 조개껍데기로 가득 차 짤랑짤랑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는데, 주머니에서 나는 소리를 보아하니 손가락으로 조개껍데기들을 만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소리에 박자 맞춰 걷는 발걸음들이 경쾌했다.
주워온 조개껍데기들을 깨끗이 씻었더니 진짜 보물같이 반짝거렸다
속초에서의 세 번째 날 아침 7시 42분.
하늘을 가르며 속초바다 위로 해가 떠올랐다.
일출이 보고 싶어 어젯밤 남편에게 꼭 깨워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잠들었었다.
아침에 남편은 말없이 커튼을 젖혔다. 7시쯤이었는데 어느새 창밖이 훤해서 일출을 놓친 건가 싶어 순간 실망을 했다. 반쯤 뜬 눈으로 창문 앞에 붙어 섰더니 다행히 아직 해는 떠오르기 전인가 보다.
급하게 나갈 채비를 했다.
아이들이 자고 있으니 멀리까지 갈 수는 없었다.
남편은 딱 좋은 곳이 있다며 숙소 바로 앞 어느 교회 주차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아침 찬바람에 눈만 내놓은 채 교회 앞을 쓸고 계시던 아저씨 한분과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교회주차장 가장자리의 화단 앞에 섰다.
담장도 낮고 바다가 바로 보이는 탁 트인 곳으로 남편의 말처럼 정말 일출을 감상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붐비지도 않아 조용했고, 어느새 청소를 끝마치신 아저씨도 들어가시고 이제 여기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매서운 칼바람에 우리는 옷을 단단히 여미면서 점점 붉어져오는 수평선 끝에 시선을 맞추고 해를 기다렸다.
사방으로 펼쳐져 온 하늘을 물들이던 붉은빛은 해가 보이기 시작하자 한 곳으로 집중됐다.
| 소원 빌자.
찬란한 빛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속으로 각자의 소원을 얘기할 뿐이었다. 어디까지 들어줄지 모르겠지만 일단 빌고 본다.
소원과는 별개로 자연이 만들어내는 황홀한 광경을 눈앞에 두고서 서로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울컥할 뿐이었다.
떠오르는 해는 마주할 때마다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
감격스럽다.
감격스러운 이 순간에도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고자 빌고 또 빌고말았다
이 멋진 광경을 아이들과 함께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 순간에 혼자가 아니어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느끼는 시간들이 늘어나고 있음에 감사하다고 느꼈다.
밝아오는 새로운 1년은 더 잘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하고 싶었던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설렌다.
2023년은 여느 해보다 즐거운 한 해가 될 것이다.
좋은 시간들을 많이 만들 것이다. 그럴수록 행복이란 감정을 많이 느끼게 될 것이다.
아이들을 자라게 하고 내 삶을 만들어가는 멋있는 엄마이자 당당한 아내 그리고 행복한 내가 되어갈 것이다.
꼭 그렇게 만들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