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더할 나위 없는

춘천

by 달콤한복이


남편이 그렇게 노래 부르던 춘천을 드디어 다녀왔다.


9년쯤 지났을까?

우리의 첫 춘천여행이 참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때 우리는 세 식구였다.

셋이서도 충분히 행복했던 시절이었지만 참 힘겨운 시기이기도 했다.


예쁜 딸 하나만 더 있으면 좋겠다!


진짜 그랬다. 우리에게 딸 하나만 더 보내주신다면 바랄 게 없었다.

웃으며 가볍게 내뱉던 그 마음은 반복된 유산을 겪으며 점점 간절해졌다.


여덟 번의 유산.


나에게 와준 고마운 아가들을 지키지도 못하고 떠나보냈다. 간절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만히 누워서 와 주기만을 기다리고, 늘 조마조마 노심초사하다가 떠나보내기를 반복했다.

세상에서 이렇게 무능한 엄마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조바심이 났다.

임신 자체가 안 되는 건 아니었기에 욕심을 냈다. 그리고 또 유산이 되었다.

꼼짝도 않고 누워 있어도 봤고, 살도 찌워봤고, 왼쪽 어깨와 귀가 아파 고통스러울 만큼 왼쪽으로만 누워 자고, 유산방지 약에 주사까지 맞아도 소용없었다.

천운으로 갖게 된 아기를 손도 써보지 못하고 보내야만 했다.


반복된 습관성 유산으로 내 몸은 아이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임신이 되면 나의 면역세포가 태아를 나쁜 세포로 인식해 공격을 해서 유산에 이르게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귀가 멍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잘 먹고 잘 자는 것, 평소와 다름없는 것들뿐이었다.


기다림이 점점 길어졌다.

횟수가 많다고 해서 덜 힘든 것도 아니었다.

다른 일들은 경험이 많으면 잘만 익숙해지던데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대부분 아기의 심장소리를 들은 지 1주일 후에 심장이 멈췄고 트라우마가 되고 말았다.

설레어야 할 심장소리를 들으러 가는 일이 두렵고 무서운 일이 되었다.


혼자서는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겉으로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그 마음을 알았던 건지 남편은 아무리 바빠도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나 혼자 병원에 보내지 않았다.

늘 산부인과로 가는 차 안에서 속절없이 벌벌 떨고 있는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주변에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보다 한참 늦게 결혼한 사람도 돌잔치를 한다고 연락이 왔고 남의 아이들은 금세 쑥쑥 자랐다. 내가 유산으로 수술을 하던 날에 조카도 태어났다.


간절했던 만큼 꼭 쥐고 있던 마음을 이제는 놓자고 마음먹었다.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말자고.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내내 미련이 남았다.


겉으로는 씩씩한척했지만 그때의 상실감과 우울감, 죄책감 등을 어떻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마음 편히 만날 사람도 별로 없었고 혼자 하루종일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식물들만 들여다보는 게 다였다. 때때로 울적해졌고 기분전환을 위해 훌쩍 여행을 떠났다.


어디라도 좋았다.

짐을 싸고 낯선 곳에 가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여행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그때부터 버릇이 된 건지도 모른다.


한 달에 격주로 2번은 여행을 다녔다. 남편의 일이 한가한 겨울에는 매주 떠나기도 했다. 2일이든 3일이든 시간만 나면 짐을 쌌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장거리를 가야 할 때는 밤늦게라도 출발해서 조금이라도 여행시간을 벌었다.


남편은 혼자서 그 고된 운전을 싫은 티 한번 낸 적 없이 흔쾌히 해주었다.

아이는 여행을 위해 해야 할 숙제를 미리 해두고 차 안에서 읽을 책들을 골라 챙겼다.

나는 여행계획을 짜고 짐을 쌌다.


늘 어디 갈지가 고민이었지만 사실 목적지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때그때 마음의 생김에 따라, 나의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풀어줄 곳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겨울에는 아무래도 눈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많이 다녔다.

그때도 그랬다.

또 유산을 했고 몸이 아팠고 하혈을 했다. 그래도 몸은 시간이 지나면 나아졌다. 피도 멎고 아픈 배도 괜찮아졌다. 하지만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뭉개져버린 마음은 나아지질 않았다.


펑펑 눈이나 내렸으면 좋겠다...






우리 그때 춘천 갔을 때 눈 진짜 많이 왔었는데.
우리 남이섬에 딱 들어가자마자 엄청 내렸잖아. 이번에는 그렇게 안 오겠지?


남편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가기 전부터 계속 눈 얘기만 했다.

하긴 이왕에 겨울여행 가는 거 눈까지 오면 더 좋긴 하겠다.

혹시나 싶어 찾아본 일기예보에 눈소식은 없었다. 그래도 너무 오랜만의 춘천이라 설레었다. 9년 전 여행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들의 기대를 키웠다.

다섯 식구가 되어 다시 가보는 춘천이 나도 기대가 된다.


다음 날 아침에, 몇 주 전부터 괴롭히던 목디스크가 세게 와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다.

목과 등이 뻣뻣해지고 침대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심장 쪽 근육이 자꾸 쪼여서 호흡도 편하게 되지 않았다. 얼마나 아프고 무서운지 펑펑 울면서 남편을 불렀다.


일단 병원부터 가야 했다. 춘천을 갈지 말지는 병원을 다녀와서 결정하기로 했다. 주사에 진통제도 평소 먹던 거보다 두 알이나 추가하고 물리치료에 견인치료에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걱정했던 엄마가 두 발로 걸어오는 모습에 안도하는 표정과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 동시에 비쳤다.

도저히 아이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어서 일정을 강행했다.

약기운에 몽롱할 때 얼른 출발하자고 남편을 재촉했다.

지금은 내 발로 걸을 수 있고 어차피 거기도 병원은 있으니까.


주사와 독한 약까지 먹어서인지 가는 내내 몽롱했다.

뒤에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옆에서 말을 거는 남편의 목소리도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들렸다.

눈도 끔뻑끔뻑 거리는 것 같았지만 마치 꿈꾸는 것 같은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남편과 대화하다가 졸다가 깨어나면 다시 얘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들었다.


우와~ 눈이다! 엄마 여기 눈 왔나 봐!


아이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새 차창밖의 풍경이 많이 달라져있었다.

도로 가장자리 그리고 산 위에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눈소식은 없다 했지만 눈이 쌓여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눈구경을 하고 갈 수도 있겠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났을 때 통증이 많이 가벼워졌다.

목을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지만 그나마 걸어 다닐만했다. 그리고 춘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눈과 얼음의 세상이었다.


꼬마는 눈이 포근해서 손이 시리지않다고 했다


길을 달리다가 넓은 눈밭을 발견하고는 차를 세웠다.

애고 어른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 나갔다.

아이들은 눈만 보면 소리를 지르고 나뒹굴었다. 꽝꽝 얼어붙은 넓은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도 탔다.

김연아언니를 흉내 내며 악셀 점프를 시도하다가 착지를 못해 엉덩방아를 찧어도 까르르 웃음소리를 냈다.



나도 몸이 근질근질하였다. 다른 것보다도 목이 아파서 얼음 위를 걸어보지도 못하는 게 이렇게 한이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우리, 노는 모습도 닮았다.


떠나기 전부터 계속 생각나던 예전의 우리 모습이 순간순간 겹쳐졌다. 우리 참 여전하구나. 그러다가도.

우리 많이 변했구나...


그때는 지금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도 만나본적이 없었다.

지나가는 어린아이들에게 나도 모르게 계속 눈길을 주던 내가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을 줄은.

나를 똑 닮은 딸을 둘이나 만나게 될 줄은.


몇 년만의 남이섬도 여전한 듯 많이 달라져있었다





9년 전 춘천에서 때마침 큰 눈을 만났다.

태어나 처음 보는 것 같은 엄청 굵은 눈송이를 잡겠다고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방방 뛰어다녔다.

금세 쌓인 눈 위에 대大자로 누워도 보고, 셋이서 몇 시간째 눈싸움을 하느라 장갑이 꽁꽁 얼어도 추운 줄을 몰랐다.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신나게 놀고 나니 풀이 죽었던 마음도 마침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더 욕심부리지 말자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시간을 보내느라 지금을 놓치고 후회하는 바보는 되고 싶지 않았다.

포기하는 심정이 반이었지만 마음을 비워내기로 했다.


그리고 한 번의 겨울을 더 보내고 우리는 남편과 나를 반반씩 나눠닮은 사랑스러운 아기를 만났다.

외롭고 힘들었던 긴 시간을 단번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준 기적 같은 아이였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삼악산 호수케이블카를 타고 의암호를 건넜다.

어디를 가도 케이블카를 절대 지나치는 법이 없는데 사실 겁이 많은 내가 좋아하는 코스는 아니다.

남편과 아들이 좋아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 타던 것인데 이젠 당연한 코스가 되었다.


겁 많은 엄마는 항상 아들의 놀림대상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오빠를 넘어서는 장난꾸러기 작은 꼬마까지 있다.

하필이면 케이블카 바닥이 투명해서 발밑이 그대로 보이는 바람에 다리는 더 달달거렸다.

나를 닮아 겁이 많은 큰 꼬마는 오빠와 동생의 장난에 울상이 됐다가 웃음도 터졌다가 또 얼굴을 찡그렸다.

그 마음을 아는 사람은 다섯 중에 우리 둘 뿐이었다. 유독 긴 춘천의 케이블카 안에서 그 둘은 하마터면 오줌을 쌀뻔했다.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과 간질간질한 아랫배를 참아가며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곳을 내려다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시원한 풍경에 가슴이 탁 트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로소 포기를 하고 마음을 놓았기에 우리가 만나게 된 걸까 아니면 사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던지 참 잘했다.

그 시간을 견디고 잘 보내주기를 참말로 잘했다.


무섭다고 포기했다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타보기를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