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미술관에 간다.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다가 ‘오늘은 미술관에 가볼까’ 마음먹게 되는 날이 있다. 전시를 찾아서 갈 때도 있지만 계획 없이 간다고 해도 좋은 곳이 미술관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혼자 나선다. 전시장을 들어가기 전과 나올 때의 기분은 다르다. 예술이 주는 에너지가 있다. 그건 감각으로도 느껴지는 경험이다.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를 걷다가 불어오는 바람, 푸릇푸릇한 풀 내음, 새소리, 초록 물결이 일렁이는 나무처럼 자연이 주는 생경한 즐거움이 있듯이 미술 작품도 감각을 팽창시키고 유연하게 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낯선 여행지에 가면 할 일이 넘치지만 하루 이틀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꼭 들른다. 그 도시에서 주목하는 예술 세계를 총망라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여행하는 장소가 달리 보인다. 잘 몰랐던 사람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몇 년 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갔다. 미술관을 거니는 사람들은 자유롭고 진지하고 호기심이 넘친다. 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그림을 보는 사람, 수첩에 뭔가를 끄적이는 미술학도로 보이는 학생, 그림 앞에서 말간 눈을 한 엄마와 아이들을 봤다. 작품을 보는 것도 좋고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도 즐겁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미술관은 여행자에게도 관대해서 누구나 공간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언제 또 올지 몰라 전시장을 다 둘러봤더니 오후 네 시를 넘겼고,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바나나와 생수가 전부였다. 밖에 나오자마자 잔디밭에 누웠는데 구름 몇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눈앞의 하늘과 방금 본 반 고흐의 작품 속 다양한 하늘색이 포개졌다. 왠지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와도 한결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여행지의 미술관은 단순한 관광이 아닌 마음이 확장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제는 오랜 추억이 된 영국 런던의 V&A 뮤지엄도 잊을 수 없는 장소이다. 헤롯 백화점을 나와 길을 걷다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는데 영국 왕실의 역사가 담긴 보석들을 볼 수 있었다. 상설 전시라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방대하고 아름다웠다. 전시를 보고 1층에 내려왔는데 관계자로 보이는 한 여자가 다가와 패션쇼 티켓을 주었다. 일본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의 패션쇼였다. 박물관과 패션쇼의 조합이라니. 당장 들어가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박물관의 아우라 속에서 경쾌한 음악과 함께 패션쇼를 즐겼고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패션과 예술 그리고 박물관이라는 역사적 공간이 만나 뿜어내는 에너지에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추억팔이만 하기에는 슬슬 좀이 쑤신다. 봄쯤에 한 번은 들렀을 미술관인데 나라 안팎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그것도 사치가 되었다. 사람이 모일만한 곳은 주의가 필요한 시기라 당연한 일이다. 사회적 위기 상황과 분위기는 마음을 메마르게 한다. 이럴 때 인스타그램으로 세계 곳곳의 미술관을 팔로우 해 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지난 3월, 덴마크의 루이지애나 현대 미술관은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으로 데이비드 호크니가 아이패드로 그린 드로잉을 올렸다. 노란 수선화가 피어있는 그림인데 순풍이 불 것 같은 수채화빛 하늘 하래 곧게 선 줄기와 고개를 떨군 모습으로 활짝 핀 수선화가 돋보인다. ‘그들이 봄을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Do remember they can’t cancel the spring)라는 그림 제목답게 데이비드 호크니는 모두가 평온한 봄을 그리워하는 시기에 디지털 드로잉으로 사람들에게 온기를 전해주었다. 예술은 먹고사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아도 분명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사람을 위로하는 힘이 있다. 생각해보면 그 또한 먹고사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 덴마크는 물론이고 영국 미국 네덜란드 등 세계 여러 나라의 미술관 소식을 접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를 산다는 건 축복일지도 모른다. 예술의 전당의 세계 음악 분수를 알고 있는가? 나는 가끔 멍하게 앉아 있고 싶은 장소를 물색하다가 그곳을 떠올린다. 원래 3월 즈음부터 음악 분수가 시작되는데 올해는 5월 초부터 가동했다고 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음악 분수 앞 인조 잔디에 앉아 있으면 클래식 음악에 맞춘 물의 춤사위를 볼 수 있다. 방금 미술관을 나왔다고 해도 또 다른 작품을 관망하는 기분이랄까. 어린아이들은 음악 분수에서 뿜어 나오는 물을 맞고 싶어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옆에 있는 부모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진을 찍는다. 걸어가던 사람들은 자연스레 걸음을 멈추고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본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찰나로 스쳐서 이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낀다. 오케스트라로 가득한 음악당이 아니라 해도 마음을 위로하는 일상의 풍경이 곧 예술이 되는 순간이다. 미술관 아트숍에 가면 주로 도록, 책갈피, 엽서를 구입한다. 책상 앞에 엽서를 붙여두고, 매일 읽는 책들 사이사이에 책갈피를 끼워 두면 기분이 좋다. 입장권은 절대 버리지 않고 다이어리에 기록과 함께 붙인다. 요즘 읽는 책에는 반 고흐의 그림이 담긴 책갈피가 끼워져 있다. 4년 전에 간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이 감정적으로 멀리 있지 않은 이유이다. 디지털 계정으로 미술관을 탐방하듯 장소에 대한 여운과 기억을 저장하는 나름의 방법이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디지털 드로잉 덕에 작년 서소문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가 떠올라 도록을 펼치거나, 2016년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 백 주년 전시 도록을 다시 펼쳐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다. 이중섭의 편지 또한 ‘편지화’라고 불릴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았는데 사랑을 노래하는 언어와 애정이 담긴 작은 그림을 보니 예술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앗! 또 추억팔이를 했다. 조용하고 부지런하게 보내는 나날 속에서도 예술은 문득 빛난다. 길을 걷다 우연히 본 5월의 빨간 장미처럼 다정하고 싱그럽다. 곧 가벼운 차림으로 미술관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