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어 보이는 건 다 하는데 척하는 건 아니고, 그걸 자기 모습으로 만드는 연예인?!’ 가수 비를 떠올리다 이런 생각을 했다. 그가 2017년에 발매한 앨범에 수록된 곡인 ‘깡’이 SNS와 유튜브를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발 늦게 깡이 뭔가 해서 유튜브를 찾아봤는데 사람들이 단 댓글과 춤, 노래의 가사를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요즘에는 유행이 될 만한 이슈도 온라인 유저들이 발굴하는 것 같다. 나는 열렬한 팬은 아니지만 <나쁜 남자> 때의 생머리를 한 비와 인상을 쓰며 레이벤 선글라스를 벗었다 쓰는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의 비도 좋아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주는 포인트들(꾸러기 표정, 아랫입술 깨물기, 치명적인 척하기 등)은 그가 늘 해온 것이다. 요즘 활동하는 가수나 아이돌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런 모습이 웃기고 신기한가 보다. 예전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비의 트레이드마크나 멋이 2020년에 와서 새로운 충격과 재미로 소환되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깡>은 한껏 뽐내지만 ‘자만하지는 않는’ 멋진 가사, 무대를 휘젓는 폭발적인 안무로 짜인 결과물이고 음악으로 인정받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급속도로 유행하는 온라인 영상이나 짤, 사진과 같은 콘텐츠를 가리키는 현상인 밈(meam)으로 수면에 떠올랐다. 원래 밈은 리처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에서 나온 개념인데 마치 유전처럼 사람의 뇌와 뇌를 거쳐 문화가 모방되고 진화하는 걸 의미한다고 한다. 요즘에는 사회·문화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하나의 요소가 복제되듯 사람들에게 번지고 유행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최근에는 서아프리카의 장례업체 전문 댄서들의 모습이 담긴 ‘관짝밈’ 영상이 인기를 끌고 패러디되기도 했다. <깡>은 앨범이 나올 당시에는 큰 호응이 없다가 최근 커버 영상, 가사나 춤을 조롱하거나 즐거워하는 댓글로 공유되기 시작하면서 밈이 된 케이스다. 사실 온라인 댓글은 긍정적인 기능을 잃었다고 평가된 지 오래이다. 네이버는 연예 기사의 댓글 창을 없애고 연관 검색어 서비스를 종료했다. 도를 넘어선 언어폭력, 익명성을 이용한 인격 모독이 잦아서 결국 문제 상황을 차단하는 방법을 썼는데 밈으로 파생된 댓글은 악의성을 띠거나 진지하기보다는 놀이로 즐기는 속성이 짙어 보인다. 나도 <깡> 영상에 달린 수많은 댓글을 읽으면서 시원하게 웃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가수(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고, 보이고 싶지 않은 성적표를 들킨 기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당사자에게는 악플보다 심한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웃긴 게 다가 아니지 않은가. 놀랍게도 비는 이런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하퍼스 바자에 실린 화보 인터뷰에서는 10대들을 향해 “나를 갖고 놀아달라”는 바람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대중에게 화제가 된다는 걸 반가워하고, 오히려 오늘은 몇 깡을 했냐고 되묻는 재치를 발휘한다. 온라인으로 시작해서 방송에 출연하고 컬래버레이션 곡을 발표하고 유통업계까지 흔들어서가 아니다. 시간이 흘러 영화 타짜에서 곽철용의 대사인 ‘묻고 더블로 가’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영철이 한 대사 ‘사딸라’처럼 소비되고 말 가능성이 높다. 밈이라는 유행은 정체되지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 흘러갈 테지만 결국 남는 건 사람이다. ‘저 사람은 여유가 있구나.’ 비는 대중이 언제, 어떤 식으로 자신을 찾아도 소화할 수 있는 내공이 있어 보인다. 2014년에 발표한 <라송 La Song>이 태진아 곡의 후렴구와 비슷하다는 평과 함께 화제가 되었을 때도 최근과 다르지 않았다. 악플 혹은 꼬집기, 비아냥으로 볼 수도 있는 반응에 대해 “그렇게 보여?”, “재밌겠는데?”라는 듯 태진아와 합동 무대를 펼쳐 ‘비진아’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검정 슈트를 말끔하게 입은 비와, 온통 노란 의상으로 빼입은 태진아의 조합은 생각 외로 신박했다. 원곡의 본래 목적이 무엇이었든 대중의 반응을 즐기고 “그럼 이렇게도 해볼까?”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말이 쉽지, 내 문제로 가져와 생각해보면 그렇게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직업을 떠나 어떤 형태로든 결과물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보는 사람들의 판단과 평가에서 자유롭지 않다. 사람들의 말, 욕, 웃음거리, 칭찬 사이에서 불안하더라도 나아갈 수 있는 건 스스로가 단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에게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내가 만든 결과물이 누구에게나 백프로 전달되고 받아들여진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설정값과 다른 반응이 올 때, 충격을 받아낼 수 있는 힘도 필요하다. 권투를 할 때 빠르고 신속하게 상대를 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아치기에 능한 사람은 경기를 이끌면서 다른 한 방을 노릴 수 있다. 유도에서는 경기 중 갑작스러운 상황을 대비하고 몸을 보호하기 위한 낙법이 필수라고 한다. 최대한 다치지 않게 넘어져야 실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말이다. 기술과 실력도 중요하지만 잘 받아치고 넘어지는 것도 능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바꿔서 생각해도 똑같다. 잘 받아치고 넘어지면서도 소신 있게 기술과 실력을 가꿔 나간다. 시대가 지나 유행과 트렌드가 바뀌고 웃음 코드가 변해도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그렇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남에게 보이는 직업을 가진 연예인이라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내공은 상황을 대하는 태도에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닐까. 수시로 일희일비하고 평가를 받지 않는 상황에서도 타인의 생각을 가정하는 나로서는 내공이 부러웠다. 근성이 있고 잘 버티는 사람을 속되게 ‘깡이 있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마음 근육이 단단하면 이런저런 상황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진지함을 진부함으로 취급하기 쉬운 요즘, <깡>의 재발견은 유행과 현상을 소비하는 재미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가치를 확인하는 데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