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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끝없는대화 Aug 10. 2020

단편적 기억들

사소한 것밖에 남지 않은

 네가 태어났을 때가 기억난다. 죽었을 때가 기억난다. 눈을 감고 있었다. 눈썹이 길었다.



 내가 2003년 초 1학년, 7살이었을 때 너를 병원 신생아실에서 처음 만났다. 상상 속 갓난아기는 보통 하얗고 작고 눈을 감고 있는 천사 같은 얼굴이었는데 처음 만난 너는 빨갛고 쭈글쭈글한 원숭이 같았다. 놀랐고 실망했다. 시간이 지나고 하얗게 변했지만 나에 비해서 피부색이 까만 편이라 크면서 많이 놀렸다.

집에 네가 온 뒤 거의 모든 동네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동생을 보여줬다. 100일 즈음 머리카락이 예쁘게 나라고 삭발해주었는데 말간 두상을 짧고 옅은 머리카락이 자라며 점점 감쌌다. 네 머리카락은 다 커서도 구름처럼 가늘고 부드러웠다. 숏컷을 해도 전혀 억세지 않고 자연스레 모양이 잡혀서 예뻤다. 속눈썹도 길고 예뻤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철없고 이기적이어서 나이차도 많이 나는 너를 참 많이 괴롭혔다. 어린 네가 말을 조리 있게 못 했기 때문에 내가 잘못한 것들을 부모님에게 네가 했다고 뒤집어씌우고 간식을 하나라도 더 많이 먹으려고 억지를 부렸다. 그냥 재미로 별걸 다 속이기도 했는데 다 커서도 잘 속았다.


 그래도 너는 나를 좋아했다. 내가 입는 옷과 머리 모양을 따라 했고 내가 무얼 해도 멋있게 봤다. 내가 친구들이랑 놀면 같이 놀고 싶어 했는데 나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어린애랑 놀기 싫었고 따돌리고 나갔다. 어릴 땐 네가 싫었던 것 같다. 그렇게 크게 피해본 것도 없었는데 싫어했다. 질투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보다 예쁘다고 생각했다. 엄청 말라서 스트레스를 받던 몸매는 나이를 먹으면서 예쁘게 자리 잡았고 무쌍인 눈도 당차 보였다. 성격도 대담했고 운동신경도 나보다 좋았고 사교성도 좋았다. 무딘 언니에 비해 예민했다. 작은 말에 쉽게 상처 받고, 작은 것에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나에게는 낯간지러워 제대로 반응해주지 않았다. 고맙다고 너에게 말해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오랜만에 집에 오면 언니,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라고 현관에서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나는 간지러웠다. 좋았던 것 같다.



 내가 고 1, 네가 초 3일 때 부모님이 많이 싸웠다. 부부싸움은 필수불가결적으로 집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두 분은 이혼하셨다. 부모님이 이혼하셨다는 것보다 집에서 금전적으로 싸우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부모님의 싸움은 보통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이혼 후 어떻게 나누느냐에 관련되어 있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주던 생활비와 양육비를 일체 끊었고 엄마는 거진 10년을 전업주부로 있다가 급하게 직장을 다녀서 딸 둘의 식비와 학원비 등을 해결했다. 동생과 방을 따로 썼는데 부모님이 싸우면 동생을 데리고 같은 방에서 귀를 막고 기다렸다. 나도 어렸지만 동생은 더 어렸고 내가 도와줘야 했다.

 부모님의 이혼 후에 그리 부족하지는 않게 자랐는데 그것이 나름 상처로 남아있었는지 성인이 되고 비상금에 조금 집착했다. 통장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목돈이 남아있어야 했고 다람쥐처럼 방 여기저기 오만 원 권을 숨겨놨다. 동생에게 생일선물은 매년 옷을 사줬다. 아빠는 법적 양육비를 엄마에게 보내는 것 이외에는 우리에게 절대 돈을 쓰지 않았고 동생이 초4 즈음 아빠와 만나서 밥을 먹으러 갔다가 울면서 돌아왔다. 엄마가 동생에게 가서 옷을 사달라고 말하라 시켰는데, 아빠가 돈이 없다며 사주지 않았다. (장례식 후 그 사건에 대해 물어봤더니 자신이 그때는 정말로 돈이 다 떨어졌었다고,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엉뚱한 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렇게 동생이 울고 돌아온 다음 날 모아뒀던 용돈을 다 털어서 쇼핑몰로 데리고 가 옷을 사줬다.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하루하루 커서 오래 못 입는다 해도 옷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어른들은 잘 모른다. 동생이 죽을 당시 가장 잘 입고 다니던 옷은 내가 사준 후드티였다.


 동생은 나와 방을 각자 썼는데 어느 날부터 동생은 내 방에서 같이 지내고 잤다.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어서 나가라고 하기도 했는데 보통은 같이 잘 지냈다. 영화도 같이 봤다. 영화관에서 분노의 질주 7을 보고 둘 다 감명받아서 노트북으로 새벽까지 1편과 2편을 중간쯤 보고 잠들었다. 야행성이라서 야식도 같이 자주 먹고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다가 잤다.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둘 다 띄엄띄엄 웃긴 얘기를 하다가 잠들라 치면 깨고 잠들라 치면 깨다가 정말 졸려서 잠들었다. 나보다도 아침잠이 더 많아서 모닝콜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못들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시끄러워서 깨고 너를 때리거나 소리질러서 깨웠다. 너는 불닭볶음면을 좋아하면서 너무 맵다고 소스를 1/3쯤 남기고 비벼먹었다. 단 빵, 과자와 하리보와 코카콜라를 좋아했다. 우리는 입맛이 비슷해서 한 사람이 이거 먹고 싶다 말하면 다른 사람도 입맛이 돌아 의기투합해서 자주 집 앞 편의점 나들이를 했다. 컵라면과 과자 음료 아이스크림 등을 털어서 집에 와서 먹었다.


나를 동경했을까, 왜 내가 좋다고 하는 음악들과 영화를 따라서 보고 나를 멋있게 봤을까, 내 자취방에 놀러 와서 언니는 혼자 살기에 최적화된 인간 같아 라고 말하고 너는 안심했을까, 네가 없어도 언니는 잘 살겠다 싶었을까. 자취방에서 혼자 못 사는 걸 보여줬으면 안심이 안돼서 떠나지 않았을까. 그래 놓고는 왜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도와달라고 했는데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아니면 내가 도와줄 상황이 안될 것 같아서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내가 좀 더 의지할 만했더라면 도와달라고 했을까...


네 머리카락은 구름처럼 부드럽고 얇았고 머리를 감지 않아서 떡지면 사방으로 갈라졌다. 무쌍이었는데 화장은 거의 하지 않았고 주로 로션과 선크림을 발랐다. 피부가 좋아서 여드름이 하나도 안 났다. 화려하게 예쁘다기보다는 얼굴형과 이목구비가 조화로웠고 어른들이 좋아하는 영특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초등학생 때 길거리 캐스팅을 받은 적이 있다. 캐스팅한 회사에서는 공익광고 등을 찍는다고 들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하지 않았다. 눈썹은 내가 한번 다듬어준 이후로 맘에 들었는지 그 모양대로 유지하고 지냈다. 말린 장미색 매트 리퀴드 립스틱을 좋아했다. 긴 머리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하지 않았고 주로 단발과 숏컷이었다. 정연처럼 잘랐는데 귀여웠다. 식사는 많이 하지 않았고 군것질을 아주 많이 했고 날씬했다. 튀어나온 각진 무릎과 살 없고 긴 손가락 발가락이 가장 선명한 기억이다. 튼살은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은 습진으로 꽤 오래 고생해서 안쪽이 쪼글쪼글했고 바세린을 자주 발랐다. 바세린을 달고 살았다. 손가락과 발가락에 얇은 털이 있었는데 그걸 눈썹 칼로 다듬는 것을 보고 웃겨서 놀렸다. 피부는 조금 건조하고 거칠었다. 다리에 닭살이 조금 있었다. 언제 크나 했는데 17살이 되자 165cm가 됐다. 신기했다. 살아있었으면 172인 나보다 더 컸을지도 모른다.


작년 봄 주말, 본가에 올라와 있었는데 동생이 친구와 스터디 카페를 간다고 기특한 소리를 해서 친구랑 간식 사 먹으라고 체크카드를 줬다. 자취방에 돌아갈 시간이 되고 카드가 필요해서 동생을 집 근처로 불렀다.  그런데 집에 안 들어오고 친구가 담배를 폈는데 자기한테 냄새가 배었다고 들어가면 안 되겠다고 횡설수설하는 거다. 만나자마자 손가락 냄새를 맡아보니 섬유탈취제 냄새로 담배냄새를 가린 티가 역력했다. 나는 동생이 고등학생이면서 담배를 폈다는 사실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생전 처음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화가 났다. 나도 담배를 피우는데 내가 병신 새끼도 아니고 어떻게 속일 생각을 했냐고 말했다. 사실 그날 공부 안 하고 놀러 갔다고 말했을 때도 으이구 하고 넘어갔는데 왜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일단 카드를 가져가야 하니 용돈이라도 줘야겠다 싶어서 근처 은행에 가서 몇만 원을 인출해서 뒤따라오던 동생에게 쥐여주려고 뒤를 돌았는데 울고 있었다. 놀랐다. 언니 미안해 라고 말하는 너는 울고 있었다. 그 몇 분 사이 화는 어느 정도 가라앉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달래주지는 못하고 그냥 성인 되면 네가 돈 벌어서 네 돈으로 사서 펴라 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도 동생에게 꼰대 짓이 하고 싶었나 보다. 울렸다는 생각에 두고두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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