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단어
이번에는 소리조차 없었다.
마리안네의 공방 문이 닫히자, 세상의 모든 데시벨이 '0'으로 수렴했다.
"......"
채현은 숨을 멈추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공간. 바닥과 벽, 천장의 경계조차 모호했다. 그림자조차 생기지 않는 완벽한 백색의 구(球)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옷을 확인했다.
기름때 묻은 회색 점프수트는 사라졌다. 대신, 봉제선 하나 없는 순백의 튜닉과 바지를 입고 있었다. 단추도, 주머니도, 지퍼도 없었다. 심지어 옷감의 질감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끄러웠다. 마치 피부 위에 얇은 막을 한 겹 씌운 것 같았다.
'여긴 어디지?'
발을 내디뎠지만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서 은색의 직육면체 하나가 보였다.
그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약간 긴 은발의 머리, 무표정한 얼굴, 헐렁한 셔츠. 미니멀리즘의 대가, 도널드 저드였다.
채현이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팩트(Fact) 그 자체였다.
채현이 입을 열려 하자, 그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입을 다물어도 소음은 멈추지 않아."
그가 허공을 가리켰다.
채현은 그제야 보았다. 자신의 주변을 떠다니는 뿌연 먼지 같은 것들을.
'여긴 뭐지', '다음은 뭐지', '퇴근할 수 있을까', '피곤하다', '월세는...', '팀장님은...'
방금까지 채현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이, 지저분한 회색 얼룩이 되어 이 완벽한 백색 공간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불필요해."
저드가 짧게 일갈했다.
그의 시선이 채현을 꿰뚫듯 응시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채현은 압도감을 느꼈다. 설명해달라고,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떼려는 순간, 그 마음조차 거추장스러운 장식처럼 느껴졌다.
채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의무감, 생존 본능, 타인의 시선, 미래에 대한 불안.
그것들이 툭,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은 잉크 방울처럼 후두둑 떨어져 내린 단어들은 바닥에 닿자마자 증발해버렸다.
더. 조금 더.
수식어를 떼어내고, 부사를 지우고, 형용사를 벗겨냈다.
내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 내가 매일 그 길을 오가는 이유.
수많은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사라졌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채현의 호흡은 차분해졌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텅 비워지고, 마침내 단 하나의 단어만이 남았다.
채현이 눈을 떴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주어도, 서술어도 군더더기였다. 그 단어 하나면 충분했다.
공기가 맑아졌다.
채현을 감싸고 있던 회색 먼지 구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도널드 저드가 처음으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없이 자신이 앉아 있던 은색 직육면체를 손으로 쓸었다. 그러자 그 상자가 스르르 열리며, 안에서 투명한 아크릴 큐브가 나타났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아니, '공간' 그 자체가 들어있었다.
그가 큐브를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왜 주는지에 대한 설명 따위는 없었다.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가라."
저드의 뒤로 벽이 갈라졌다.
이번에는 눈이 아플 정도로 현란한 네온 사인의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고요한 침묵의 세계가 깨지고, 다시금 시끄러운 세상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