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기지 않는 구조
아르데코의 굉음이 등 뒤에서 닫혔다.
갑작스러운 고요.
채현은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조금 전까지의 화려한 크롬 장식과 현란한 속도감은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기름 냄새와 차가운 금속 냄새가 섞인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높은 천장, 노출된 콘크리트 벽, 그리고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작업대들.
거대한 공장 같기도 하고, 실험실 같기도 한 공간이었다.
채현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은색 비즈가 박힌 플래퍼 드레스는 어느새 사라지고, 튼튼한 면 소재의 네이비 점프슈트(Jumpsuit)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공구들이 꽂힌 벨트가 채워져 있었다. 발에도 굽 높은 구두 대신 바닥이 평평하고 미끄러지지 않는 작업화가 신겨져 있었다.
"움직이기 편해."
채현은 팔을 휘저어 보았다. 장식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 어떤 옷보다 자유로웠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자 묵직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단호하고 명료한 목소리.
작업대 뒤에서 한 여자가 용접 마스크를 벗으며 나타났다.
짧게 자른 머리, 날카로운 눈매,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터틀넥. 금속 공예가 마리안 브란트였다.
"어서 와,
그녀는 채현을 '여행자'가 아닌 '기술자'라고 불렀다.
"다음 문을 열고 싶다면, 증명해야 해. 네가 장식가가 아니라 설계자라는 사실을."
마리안네가 턱짓으로 작업대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수십 개의 금속 부품과 전선, 유리 전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의 원색 전선들이 마치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얽혀 있었다.
"이 부품들로 조명을 완성해. 시간은 10분."
"조명이라뇨? 설명서도 없는데요?"
"설명서는 필요 없어.
둥근 것은 구르기 위해, 뾰족한 것은 꽂히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니까."
마리안네는 타이머를 눌렀다. 째깍, 째깍. 초침 소리가 건조한 공기를 갈랐다.
채현은 작업대 앞에 섰다. 막막했다. 아르누보에서는 감각으로 그렸고, 아르데코에서는 본능으로 뛰었다. 하지만 이건... 논리였다.
'부품의 생김새가 설명서라고?'
채현은 금속 원판을 집어 들었다. 묵직했다. 바닥을 지탱할 베이스다.
긴 파이프는 기둥일 것이고, 반구형의 유리는 전구를 감쌀 갓이겠지.
'생각해. 왜 이렇게 생겼는지.'
채현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볼트를 조이고, 너트를 맞췄다.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질 때마다 손끝에 기분 좋은 진동이 전해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전선을 감추고 싶었다. 지저분하게 늘어진 삼원색의 전선들이 눈에 거슬렸다.
'이걸 기둥 안으로 넣어서 안 보이게...'
채현이 전선을 파이프 속으로 억지로 밀어 넣으려 낑낑대자, 마리안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네? 그냥 깔끔하게 정리하려는 건데요."
"재료의 본성을 숨기는 건 기만이야. 전선은 전기를 흐르게 하는 핏줄이라고. 그게 왜 부끄러운 거지?"
마리안네가 다가와 채현의 손에서 전선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파이프 밖으로 당당하게 드러내어 배선했다. 빨간색 전선이 은색 파이프를 타고 흐르자, 그 자체로 강렬한 시각적 포인트가 되었다.
그 말에 채현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 회사에서 해온 디자인은 무엇이었나. 형편없는 기획을 가리기 위해 화려한 이미지를 덧씌우고, 빈약한 내용을 숨기려 복잡한 레이아웃을 쓰지 않았던가.
채현은 심호흡을 했다. 장식하려는 욕망을 버렸다.
전구, 스위치, 지지대.
각자의 역할을 하는 녀석들을 가장 정직한 자리에 놓아주었다.
마지막 나사를 조이자, 기하학적인 형태의 조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군더더기라곤 하나도 없는, 차갑지만 아름다운 비례.
"스위치를 올려."
채현이 떨리는 손으로 스위치를 딸칵, 올렸다.
유리 갓을 통해 맑고 깨끗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은 작업대의 어지러운 그림자들을 단숨에 지워버렸다.
"훌륭해."
마리안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작업대 위에 굴러다니던 작은 강철 너트 하나를 집어 채현에게 던져주었다.
채현이 너트를 받아 들었다. 차갑고 단단했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이 작은 부품이, 세상 무엇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자, 이제 가 봐. 다음 역은 여기보다 더 텅 빈 곳일 거야."
마리안네의 말대로였다.
육중한 철문이 열리자,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백만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