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아르데코의 질주

망설이면 떨어진다

by Dalgoongjun

아르누보의 문이 열리자마자, 채현의 머리카락이 강한 바람에 휘날렸다.

이전 칸의 부드럽고 유기적인 공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 그리고 규칙적인 금속음이 고막을 때렸다.


"여기는..."


채현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파티장과 초고속 열차의 엔진실을 합쳐놓은 듯했다. 바닥은 흑백의 대리석이 체스판처럼 정교하게 깔려 있었고, 벽면은 크롬 도금된 기하학적 패널들이 번쩍였다. 천장의 조명은 다이아몬드처럼 각진 샹들리에가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모든 것이 직선이었고, 모든 것이 대칭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빨랐다.


채현은 자신의 옷 또한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르누보의 치렁치렁한 드레스는 사라지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직선적인 실루엣의 플래퍼 드레스(Flapper dress)를 입고 있었다. 은색 비즈가 기하학적 패턴으로 박혀 있어, 움직일 때마다 차갑고 날카로운 빛을 튕겨냈다. 공기 저항을 최소화한 듯 날렵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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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잉- 척! 위잉- 척!


좌우 벽면에서 톱니바퀴들이 오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바닥의 일부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빠르게 움직였고, 허공에는 사선으로 쪼개진 발판들이 징검다리처럼 떠 있었다.


"속도가 곧 미학이지."


도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현이 고개를 들자, 높은 단상 위에 앉아 있는 여자가 보였다. 짧은 보브컷 머리에 핏이 딱 떨어지는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자. 그녀는 녹색 부가티 레이싱카의 보닛 위에 모피 코트를 걸치고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타마라 드 렘피카?"


강렬한 눈빛, 차가운 인상. 미술관에서 보았던 '녹색 부가티를 탄 자화상' 속의 그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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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물거릴 시간 없어, 아가씨. 4번 플랫폼은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타마라는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피스톤들이 상하로 움직이며 길을 만들고 있었다. 피스톤은 정확한 박자에 맞춰 위아래로 움직였는데, 그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아래쪽의 까마득한 어둠으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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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아르데코 엔진'.

균형과 속도를 시험하는 곳이야. 자네가 가진 그 늘어지는 감성으로는 어림도 없지."


타마라가 비웃 듯 말했다.

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르누보 역에서 얻은 감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금 긴장감이 목을 조여왔다.


"어떻게 해야 하죠?"


"박자를 타.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몸으로 느껴.

신도림 환승 계단을 내려가던 때처럼, 1초의 오차도 없이 끼어들어 가는 감각."


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신도림 환승 계단이라. 그건 채현의 전공 분야였다. 매일 아침 신도림역에서, 수천 명의 인파 속에서 어깨를 들이밀고 타이밍을 재던 그 생존 기술.


"해보죠."


채현은 신발 끈을 고쳐 맸다.

첫 번째 피스톤이 내려오는 순간.


쿵-!


채현은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하나, 둘, 셋.

착지, 도약, 다시 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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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타일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크롬 장식들이 빛을 반사하며 시야를 어지럽혔지만, 채현은 오직 발판의 리듬에만 집중했다.


탕, 탕, 탕!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아르누보 역에서의 느긋한 곡선 그리기와는 전혀 다른 쾌감이었다. 이건 경쟁이었다. 속도와의 경쟁, 그리고 중력과의 경쟁.


"좋아, 나쁘지 않아! 조금 더 과감하게!"


타마라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하지만 마지막 구간이 문제였다.

도착점으로 향하는 발판들을 지나가야 했는데, 발판의 간격이 너무 멀었다.

게다가 발판은 계속해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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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의 망설임. 완벽주의가 발목을 잡았다. 저 움직이는 속도를 계산하고, 내 보폭을 계산하고...

그 찰나의 머뭇거림이 치명적이었다.


이익-!


발을 내디딘 순간, 타일이 미끄러웠다.

채현의 몸이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아래쪽의 톱니바퀴들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안 돼...!"


눈앞이 아찔했다. 손에 쥐고 있던 아르누보의 황동 코인이 주머니에서 빠져나가 허공으로 떨어졌다.


'토큰!'


저걸 잃어버리면 끝이다.

채현은 추락하는 와중에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은 허공을 갈랐다.


"박자를 놓치지 마!"


타마라의 호통이 들려왔다.


채현은 눈을 감았다 떴다.


박자. 리듬.

이 굉음들 속에 숨어 있는 규칙적인 비트.


쿵, 짝, 쿵, 짝.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드럼 비트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채현은 떨어지는 반동을 이용해 아래쪽 파이프를 발로 찼다.


깡-!


금속 마찰음과 함께 몸이 위로 솟구쳤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떨어지던 코인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빠르게 움직이던 발판의 가장자리에 착지했다.


"하아,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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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도착점인 플랫폼 난간을 잡았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성공은 했지만,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렸다. 아직은 이 박자가 몸에 완전히 익지 않은 탓이었다. 내 것이 아닌 리듬을 억지로 빌려 쓴 듯한 위태로움이 남아 있었다.


"제법인데?"


타마라가 눈앞에 와 있었다. 그녀는 채현의 손에 들린 코인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은빛 목걸이를 풀어주었다. 기하학적인 삼각형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이건 두 번째 토큰. 속도를 지배한 자만이 가질 수 있지."


채현은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받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뜨거운 손바닥 위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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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돌함을 잃지 마. 세상은 자네가 멈춰 있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타마라가 윙크를 했다.

그 뒤로 굉음과 함께 다음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차갑고 정제된, 기계적인 질서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