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기억해낸 것들
채현은 홀린 듯 열차에 올랐다.
발을 내디디는 순간, 신도림역의 건조한 공기가 완전히 다른 질감으로 바뀌었다. 눅눅한 쇠 냄새 대신 달콤하고 씁쓸한 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곳은..."
채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열차 내부는 그야말로 움직이는 거대한 온실이었다. 천장은 반투명한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어, 터널의 어둠 대신 따스하고 부드러운 호박색 빛이 쏟아져 내렸다. 좌석은 벨벳 천으로 감싸진 곡선형 소파였고, 손잡이는 덩굴식물 줄기처럼 유려하게 꼬여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선'이었다.
직선은 어디에도 없었다. 창문 프레임, 조명 갓, 심지어 바닥의 카펫 무늬까지 모든 것이 유동적인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 뱃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문득 낯선 감촉이 느껴져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아침에 입고 나온 하늘색 블라우스와 헐렁한 데님, 그리고 그 위에 걸쳐져 있던 하얀 카디건은 온데간데없었다. 데님 특유의 빳빳한 감촉 대신, 식물 줄기처럼 유려한 주름이 잡힌 긴 드레스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옷자락이 꽃잎처럼 사르락거리며 발목을 스쳤다. 그 부드러운 구속감이 묘하게 편안했다.
"아름다워..."
채현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디자인을 처음 시작했을 때 느꼈던, 순수한 조형미에 대한 감동이 오랜만에 가슴을 두드렸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현이 고개를 돌리자, 객차 끝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짧은 머리와 자연스럽게 흩어진 수염, 그리고 품 넉넉한 작업복.
그는 돌처럼 평평하고 넓은 석판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기름기 있는 크레용과 솔, 그리고 천이 놓인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남자는 석판 위에 조심스럽게 눈금과 선을 따라 기름진 선을 그어 넣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힘으로 무언가를 닦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돌의 표면과 대화하듯 섬세한 균형을 잡는 듯 보였다.
그 표면은 아직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채 잠들어 있었지만, 남자의 손끝에 닿는 순간부터 이미 이미지로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누구세요?"
"알폰스."
남자는 도구를 내려놓고 채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몽상가 같으면서도, 동시에 치열한 노동자의 피로가 묻어 있었다.
채현은 대학 시절 미술사 책에서 봤던 거장을 떠올렸다. 아르누보의 아버지. 우아한 포스터와 장식 예술의 대가.
알폰스는 온화하게 웃으며 채현에게 다가왔다.
"자네의 눈은 지쳐 있군. 직선과 격자에 갇혀서, 생명의 리듬을 잊어버렸어."
그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채현은 회사에서 픽셀 단위로 그리드를 맞추고, 딱 떨어지는 정렬에 강박적으로 집착해 왔다.
"저는... 그냥 직장인이에요. 예술가가 아니라."
채현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알폰스가 껄껄 웃었다.
"예술가? 나도 처음엔 그저 가난한 삽화가였어. 크리스마스이브에 다들 휴가를 떠나고 인쇄소에 나 혼자 남아 있었지. 그때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도 평생 이름 없는 기능공으로 살았을 거야."
그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황금빛 입자들이 모여 길쭉한 포스터 형상을 만들었다. 전설적인 연극 '지스몬다'의 포스터였다. 화려한 금박과 이국적인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실물 크기의 여배우.
"모두가 내 그림을 비웃었어. 너무 길고, 너무 복잡하고, 기존의 규칙을 하나도 따르지 않았다고. 인쇄소 사장은 찍어내기 싫어했지. 하지만 대중들은 달랐어. 그들은 밤사이에 내 포스터를 뜯어가려고 아귀다툼을 벌였지."
알폰스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그림이 갤러리에만 갇혀 있는 걸 원치 않았네. 거리에, 벽보에, 과자 상자에, 심지어 담배 케이스에도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어. 예술은 소수만 즐기는 사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일상을 위로하는 빵과 같은 것이니까."
채현은 그 말을 곱씹었다. 자신이 하는 디자인은 무엇이었나.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 찍어내는 공산품?
"하지만 지금 자네의 빵은 맛을 잃고 딱딱하게 굳어버렸지. 자네도 느끼고 있지 않나?"
채현은 반박할 수 없었다. 팀장의 독설보다 더 아픈 지적이었다.
"이 열차는 자네가 잃어버린 감각의 재료들을 하나씩 되찾아가는 순례길이야. 이곳 아르누보 정원은 그 시작점일 뿐이지."
알폰스가 열차의 진행 방향을 가리켰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앞으로 자네는 질서와 속도의 시대를 지나, 기능의 실험실, 그리고 본질만 남은 텅 빈 공간까지 거쳐야 해. 각 정거장마다 그 시대를 이끌었던 마스터들이 기다리고 있을 걸세."
"그저... 지나가면 되는 건가요?"
알폰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죽어가는 감각을 다시 살려내겠다는 의지. 그것을 증명해야만 다음 문이 열릴 거야. 만약 실패한다면... 자네는 영원히 이도 저도 아닌 회색 틈새에 갇히게 되겠지."
채현은 문득 울컥하는 감정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죽은 빵이니, 회색 틈새니, 다들 왜 이렇게 쉬운 말을 하는 걸까.
"말씀은 참 좋네요."
채현이 비딱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거장이시니까 그렇게 이상적인 말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저 같은 일개 부속품에게는 예술이니 뭐니 하는 건 사치라고요. 세상이 우리를 딱딱한 빵으로 만드는 건데, 왜 제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 것처럼 말씀하세요?"
알폰스는 화를 내는 대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세상이 딱딱하게 만든다면, 반죽을 다시 치대는 건 자네 몫이지. 자, 증명해 보게. 자네가 아직 반죽할 힘이 남아있다는 걸."
"......"
채현은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오기가 생겼다.
그래, 한번 해보자고. 반죽이든 뭐든.
"준비됐나? 그럼 첫 번째 시험을 시작하지."
알폰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객차 바닥에서 거대한 넝쿨 식물이 솟아올랐다. 넝쿨은 채현의 발목을 휘감더니 앞쪽의 굳게 닫힌 문을 가리켰다. 문에는 복잡한 꽃무늬 패턴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문을 열어야 다음 칸으로 갈 수 있어. 문양이 끊어져 있네. 빈 곳을 채우게. 단,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자연의 호흡을 따라 그려야 해."
"그리라뇨? 그럼 잠시만요."
채현은 반사적으로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냈다. 습관이었다.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당연히 태블릿부터 찾는 것.
전원 버튼을 눌렀다.
묵묵부답.
화면은 켜지지 않았다. 배터리는 분명 100%였는데, 마치 전기가 발명되기 전의 세상에 온 것처럼 차가운 검은색 거울일 뿐이었다. 애플 펜슬도 먹통이었다.
"이게 왜 이러지? 고장 났나?"
채현이 당황하며 아이패드를 흔들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알폰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어떡해요? 전 아무런 도구도 없는데요."
채현이 울상으로 물었다. 디지털 도구가 없는 디자이너는 전쟁터에 맨손으로 던져진 병사나 다름없었다.
"과연 그럴까? 자네는 이미 아주 훌륭한 도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알폰스가 채현의 가방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
채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대학 시절부터 습관처럼 들고 다녔지만, 회사에 입사한 뒤로는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던 그것.
채현은 떨리는 손으로 가방 깊숙한 곳에서 낡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패턴은 반복이야. 하지만 기계적인 복제가 아니지.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파도가 밀려오고 나가는 것처럼, 생명의 순환을 그려야 해."
알폰스의 조언을 되뇌며 채현은 문 앞에 섰다.
비어 있는 패턴은 백합 줄기와 잎사귀가 얽혀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의 반발심은 여전했다.
'하...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이런다고 내 내일 출근길이 달라지냐고 묻고 싶었다. 유치한 소꿉놀이 같았다. 거장의 고상한 취미 생활에 장단 맞춰주는 꼴이라니.
채현은 스케치북을 집어넣으려다 멈칫했다. 알폰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오기가 발동했다.
채현은 거칠게 스케치북을 펼쳤다. 공교롭게도 아침에 집에서 보았던 바로 그 마지막 페이지였다.
툭, 툭 끊겨 있던 미완성의 선들. 생각은 있는데 이어지지 않던 바로 그 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
아침의 패배감이 되살아났다. 이 페이지에는 더 이상 손댈 수 없을 것 같았다.
채현은 입술을 깨물며 신경질적으로 한 장을 더 넘겼다.
촤르륵.
하얀 새 종이가 나타났다.
티끌 하나 없는 백색의 공간. 그 무결함이 순간 채현의 시선을 붙들었다.
'...'
채현은 홀린 듯 연필을 쥐었다.
나무 몸통 속에 흑연 심이 박힌,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감촉.
망설임 끝에 연필 끝을 하얀 종이에 댔다.
톡.
검은 점 하나가 하얀 세상에 찍히는 순간, 미세한 진동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마치 정전기가 일어난 듯 찌릿했다.
스으극, 사각사각.
흑연이 종이의 거친 결을 긁고 지나가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태블릿의 매끄러운 유리판 위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마찰감. 그 서걱거리는 저항감이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마음속에 뾰족하게 솟아있던 가시들이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팀장의 비난도, 클라이언트의 독촉도, 알폰스에 대한 반감도 하얗게 지워졌다.
오직 선과 나,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채현의 손이 춤추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에 새겨진 끊어진 줄기를 눈으로 좇으며, 종이 위에 유려한 곡선을 그려 나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케치북에 그린 선이 황금빛 입자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입자들은 문에 새겨진 빈틈으로 스며들어, 차가운 금속을 살아있는 넝쿨로 변화시켰다.
채현은 완전히 몰입했다. 손끝에서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회색빛으로만 보이던 세상에 다시금 색채와 형태가 입혀지고 있었다.
철컥- 스르릉.
마침내 패턴이 완성되자,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 너머에서는 더욱 찬란한 빛과, 기계적인 질서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통과했군."
알폰스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채현의 손에 작은 황동 코인을 쥐여 주었다. 코인에는 백합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건 자네가 되찾은 감각의 증거야. 잃어버리지 말게."
열차가 덜컹거렸다.
다음 역으로 향하는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알폰스의 마지막 말이 회색 도시에 지친 디자이너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