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선 플랫폼
심장 박동 소리는 선명한데, 주변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신도림역 4번 플랫폼.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45도 각도로 숙이고 손바닥 위의 작은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대화는 없었다. 웃음소리도, 짜증 섞인 한숨 소리도 없었다.
들리는 것은 오직 거대한 기계음뿐이었다.
반대편 선로로 들어오는 열차의 마찰음,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닫히는 공기압 소리,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무미건조한 안내방송.
"이번 역은 신도림... 내리실 문은..."
채현은 문득 소름이 끼쳤다. 이 많은 사람이 숨은 쉬고 있는 걸까? 마치 정교하게 세팅된 마네킹들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거대한 회색 도시에 부속품처럼 끼워진 채, 전원이 켜지기만을 기다리는 기계들.
그때였다.
"치이익..."
안내방송이 기묘하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전...차... 아가... 드으으... 어... 옵... 니... 다..."
마치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진 것처럼, 혹은 배터리가 다 된 인형이 내는 소리처럼 웅웅거렸다. 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어폰을 뺐다. 노이즈 캔슬링의 오류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어폰을 뺀 세상의 소리는 더 기괴했다.
위잉- 위잉-
날카로운 이명이 고막을 찔렀다. 채현은 반사적으로 귀를 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채현은 숨을 멈췄다.
"어...?"
없었다.
방금 전까지 채현의 앞뒤를 꽉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스마트폰을 보던 정장 입은 남자, 에코백을 멘 대학생,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 그 수백 명의 인파가 증발하듯 사라지고, 텅 빈 승강장에는 오직 채현 혼자만 남겨져 있었다.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채현의 목소리가 텅 빈 터널을 울리고 되돌아왔다. 공포가 엄습했다.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아니면 내가 잠깐 기절이라도 했던 걸까?
팟! 파앗-!
스크린도어 너머의 어두운 터널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평소의 누런 조명이 아니었다. 보라색과 에메랄드색이 뒤섞인 기묘한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그 빛의 파편들이 모여 공중에 문장을 새겼다. 홀로그램도 아닌 것이, 마치 공기의 밀도가 변해 만들어진 신기루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 SYSTEM : PLATFORM RECONSTRUCTION ]**
메시지가 뜨자마자 플랫폼 전체가 진동했다.
우우웅-
낮은 베이스 소리가 바닥을 타고 발바닥으로 전해졌다.
회색 시멘트 바닥이 마치 물결치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딱딱한 고체가 반쯤 녹은 젤리처럼 변형되더니, 채현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스으극, 스으극.
차가운 사각형 타일들이 쪼개지고 뭉치며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단순히 바닥만 변하는 게 아니었다. 콘크리트 기둥이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날카로운 천장의 형광등이 부드러운 호박색 구체로 변해갔다.
채현은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이미 바닥은 거대한 생물체의 등 가죽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물리 법칙이 무시된 공간. 직선의 세계가 붕괴하고 있었다.
그 혼란의 중심에서 다시 한번 빛의 글자가 떠올랐다.
**[ MODE : ART NOUVEAU - ACTIVATING ]**
새로운 메시지와 함께 변형의 속도가 가속화되었다.
그 단어가 신호탄이라도 된 듯, 밋밋하던 스크린도어 프레임에서 금속 줄기가 자라났다. 강철 줄기는 덩굴식물처럼 뻗어 나가며 사방을 감쌌다. 차갑고 직선적이던 현대의 역사가, 순식간에 19세기 말 파리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갤러리 입구처럼 뒤틀렸다.
꾸우우웅-!
육중한 금속음과 함께 열차가 진입했다. 강남행 2호선이 아니었다. 서울메트로의 로고도, 녹색 띠도 없었다.
황동으로 도금된 외관은 거대한 관악기처럼 빛났고, 곡선으로 마감된 창문은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오묘한 빛을 냈다. 증기기관차의 감성과 미래적인 유선형 디자인이 기묘하게 결합된, 압도적인 비주얼의 열차였다.
열차의 헤드라이트가 텅 빈 승강장에 홀로 서 있는 채현을 정통으로 비췄다. 눈이 부셔 손으로 가려야 했다.
치이익-
열차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하얀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증기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제복을 입은 남자. 깃이 높은 셔츠에 단정한 베스트를 입고, 한 손에는 회중시계를 든 남자였다.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피부의 질감이 도자기처럼 너무나 매끄러웠고, 눈동자에는 감정 대신 푸른색 데이터 로그가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는 텅 빈 승강장을 한번, 그리고 채현을 한번 바라보았다. 마치 이 상황이 당연하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어서 오십시오, 디자이너."
남자의 목소리는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뇌로 직접 전달되는 듯했다. 정중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울림이었다.
채현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멍하게 남자를 보고 있는 채현을 보며 그는 말했다.
"타시겠습니까? 아니면..."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남자가 내민 손에는 회중시계가 들려 있었다. 똑딱, 똑딱. 그 소리가 채현의 심장 박동과 정확히 일치했다.
텅 빈 신도림역.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눈앞에 멈춰 선 황금빛 열차.
채현은 직감했다. 이 열차에 타지 않으면, 다시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호기심이 공포를, 아니 권태를 집어삼키는 건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