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생각은 있는데, 선이 이어지지 않는다

선이 멈춘 자리

by Dalgoongjun

송내역 광장에 자전거를 반납하는 순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고작 5분 페달을 밟았다고 지칠 체력은 아니었다. 이것은 심리적인 반응이었다. 눈앞에 버티고 선 거대한 역사,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 이제 곧 시작될 출근길이라는 거대한 압박감이 물리적인 무게가 되어 폐부를 짓누르는 것이었다.

아침의 상쾌함은 딱 거기까지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수십 명의 인파가 뿜어내는 열기와 소음이 채현을 덮쳤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채우던 '연결'이니 '본질'이니 하는 고상한 생각들은 순식간에 증발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생존 본능뿐이었다.


채현은 개찰구에 카드를 찍으며 전광판을 확인했다.


[용산 급행 당역 접근]

[용산 급행 부평 도착]


"뛰어야 해."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 승강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플랫폼은 검은 머리의 바다였다. 채현은 그 바다를 헤치고 본능적으로 '5-3'이라고 적힌 노란색 번호 앞에 섰다. 신도림역 환승 계단과 가장 가까운 명당.


"지금 들어오는 열차는 용산, 용산행 급행열차입니다."


열차가 들어왔다. 콩나물시루처럼 꽉 찬 객차를 보며 채현은 망설임 없이 몸을 구겨 넣었다. 하얀색 카디건 자락이 사람들 틈에 낄 뻔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깨가 끼고, 백팩이 눌리고, 누군가의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에 닿았다.


'숨 막혀.'


문이 닫히는 순간, 채현의 세계는 단절됐다.

이어폰을 꽂고 '화이트 노이즈' 모드를 켰다. 치이익. 노이즈 캔슬링이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자, 거대한 수조 속에 갇힌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덜컹, 덜컹.

20분의 시간이 삭제되었다.

멍하니 차창 밖을 보던 채현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어 있었다. 부천, 역곡, 개봉... 익숙한 풍경들이 회색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번 역은 신도림, 신도림 역입니다."


마침내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나가는 사람들 틈에 휩쓸려 내렸다. 초록색 스니커즈가 회색 바닥을 분주하게 두드렸다.


지금 시각 8시 4분.

이제부터가 진짜 전쟁이었다.


탁, 탁, 탁, 탁.


수백 개의 구두굽 소리가 거대한 메트로놈처럼 터널을 울렸다. 채현은 기계처럼 걸었다. 5-3 칸에서 내려 환승 계단으로, 그리고 다시 4번 플랫폼으로.


subway4hours_scene01_toplatform.png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팀장의 메일이었다.


[Re: A안 시안 피드백 - 전면 수정 요망]

[채현 씨, 톤앤매너가 너무... 힘이 빠져 있어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건 임팩트라고 했잖아요.]


채현은 헛웃음을 삼켰다.

임팩트. 생기.


팀장의 말이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고개를 들어 환승 통로의 벽면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원색의 광고판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빨강, 파랑, 노랑이 섞여 있을 터였다.

하지만 채현의 눈에는 그저 채도 빠진 회색 덩어리들처럼 보였다.

세상이 흑백 TV 속 화면처럼, 잉크가 다 떨어진 불량 인쇄물처럼 흐릿했다.


'디자인은 문제 해결'이라고?

개뿔. 내 일상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데.


"지각 마지노선 8시 8분 차."


4번 플랫폼에 도착했다. 늘 그렇듯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스크린도어 앞에 선 사람들의 등은 거대한 회색 벽과 같았다. 다들 좀비처럼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채현은 그 행렬의 맨 뒤에 섰다. 폐부 깊숙이 고여 있던 묵직한 권태가 한숨이 되어 흩어졌다.

오늘도 똑같은 하루. 무채색의, 디자인되지 않은, 그저 견뎌내야 하는 하루.


"이번 역은 신도림... 치이익... 도림 역입니다."


순간, 안내방송이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기괴하게 늘어졌다.

잘못 들었나. 채현이 고개를 불현듯 들었을 때, 스크린도어에 비친 자신의 모습 뒤로 낯선 보라색 불꽃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회색 벽과 무표정한 사람들뿐이었다.


subway4hours_scene01_purplespark_2k.png


"피곤하네, 진짜."


채현은 헛것을 본 거라 치부하며 이어폰의 노이즈 캔슬링 강도를 최대로 높였다. 세상의 소리가 뚝 끊기고, 오직 자신의 심장 소리만 남았다.


쿵, 쿵, 쿵.


그 소리마저 지쳐, 느릿하게 들렸다. 마치 고장 난 메트로놈처럼.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