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회색의 아침

출근이라는 이름의 반복

by Dalgoongjun

새벽.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눈이 떠져 있었다.


요즘은 늘 그랬다. 깊이 잠들지 못한 채, 얕은 수면 위를 떠다니다가 아침을 맞는다. 그래도 몸을 일으키며 채현은 생각했다. 이 정도면 아직 괜찮은 편이라고. 예전엔 새벽 두세 시까지 작업을 해도 멀쩡했으니까. 지금은 자정만 넘어도 다음 날의 리듬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아직은—버틸 수 있었다.


주방 한쪽에는 전날 밤의 자신이 남겨둔 흔적이 있었다. 잡곡밥, 계란말이, 브로콜리 몇 송이. 모양은 서툴렀지만 손으로 만든 음식이었다. 요즘 들어 거의 사라진, 몇 안 되는 ‘손의 시간’. 채현은 그 도시락을 보며 잠깐 웃었다.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세수를 하며 거울을 보았다. 피로가 쌓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아직 죽지 않았다. 양치를 하며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켰다. 어젯밤 돌려둔 작업 결과들이 화면 위에 정렬돼 있었다.


미드저니, 프리픽, 파이어플라이, 그리고 열어둔 채 잠든 챗GPT 창.

빠르고, 정확하고, 깔끔한 결과물들.


'bauhaus style poster, minimalist typ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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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같으면 며칠은 걸렸을 작업이 몇 분 만에 완성돼 있었다. 이상할 만큼 쉽게. 채현은 그걸 보며 잠시 멈췄다. 편리함에 대한 감탄과, 설명하기 어려운 낯섦이 동시에 스쳤다.


가방에 아이패드와 애플 펜슬을 넣고, 충전기를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상 구석에 놓인 낡은 몰스킨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채현은 스케치북을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연필로 그리다 만 스케치가 남아 있었다.

복잡하게 엉킨 선들. 머릿속에는 분명 완벽한 이미지가 있었다. 유려한 곡선과 단단한 구조가 조화를 이루는 어떤 형태. 하지만 손끝에서 나온 선들은 툭, 툭 끊어져 서로 닿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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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있는데... 선이 안 이어지네."


채현은 쓰게 웃으며 스케치북을 덮었다.

대학 시절엔 선 하나만 그어도 가슴이 뛰었는데. 지금은 머릿속의 이미지를 끄집어내는 통로가 막혀버린 기분이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둘 중 하나를 버릴 수는 없었다. 도구가 달라질 뿐, 자신이 하는 일의 본질은 같다고 믿었으니까.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늘색 브이넥 블라우스에 통이 넓은 데님 팬츠. 그 위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하얀색 롱 카디건을 걸쳤다. 편안하면서도 활동적인, 전형적인 '작업하기 좋은' 복장이었다. 어깨에는 묵직한 검은색 백팩이 매달려 있었다.


이제 디자인은 단순히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퍼블리싱, 코드, 영상, 데이터, 마케팅. 해야 할 일은 늘어났고, 경계는 사라졌다. 채현은 그 변화가 싫지 않았다. 경계가 무너질수록 새로운 문이 열린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파트 단지를 나서며 공유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초록색 스니커즈가 경쾌하게 원을 그렸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폐부로 들어왔다.


'디자인은 결국 문제 해결의 도구야.'


채현은 이 문장을 오래 붙잡고 살아왔다. 그래서 여전히 새로운 툴을 배우고, AI와 코드와 영상 사이를 오간다. 도구는 바뀌어도 목적은 같다고 믿었다. 더 나은 소통. 더 정확한 전달. 더 오래 남는 인상.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동안, 채현은 작게 웃었다.


“그래. 결국 다 연결되어 있지.”


그 생각은 아직 유효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송내역으로 향하는 이 짧은 아침 시간만큼은, 자신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채현은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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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