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3)도쿄의 자판기엔 감정이 없다

차가운 기계들 속에서 인간적인 따뜻함을 배우다

by 희유


도쿄는 자판기의 도시다.

지하철 출구에도, 골목 모퉁이에도, 심지어 신사 앞에도 자판기가 있다.

더운 여름엔 차가운 녹차가, 겨울엔 따뜻한 캔커피가 줄을 선다.

심지어 밤 열두 시에도 불빛이 꺼지지 않는다.


이곳에 오래 살다 보면,

사람 대신 자판기에 말을 걸게 된다.

"오늘은 조금 더 뜨거운, 블랙으로 부탁해."

그럼 기계는 아무 말 없이, 정확하게,

그리고 무표정하게 내 손에 커피를 내민다.

'더 뜨거운'은,

그 날의 온기가 더 필요했던 나의 은근한 투정일 뿐

자판기의 온도는 어제처럼, 언제나 변함이 없다.

그게 오히려 편안하다.


처음엔 자판기 문화가 낯설었다.

음료 하나를 주문하는데 점원을 불편하게 하는게

미안하다는 이유로 도입된 자판기 문화가

아예 사회적으로 깊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같은 기능, 변치않는 온기를 제공한다.


"감정이 없다"는 게 이렇게 편할 줄 몰랐다.

한국에서 자주 가던 커피숍 사장님이 떠오른다.

주문 한 잔에도

"오늘 많이 춥죠?" , "따뜻한 커피로 드릴까요?"

"산미가 좋으세요, 고소함이 좋으세요?"

이런 온기가 있었는데,

이 자판기 앞에는 오롯이 '기능'만 남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무표정함'이 어느 순간 따뜻하게 느껴졌다.

말이 없는데도, 늘 제자리에 있고,

내가 필요할 때 언제나 응답해 주는 존재.

사람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정밀한 리듬.


언젠가 생각했다.

도쿄의 자판기는 어쩌면

'감정 없는 기계'가 아니라

'감정을 대신 견뎌주는 기계' 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에게 지치고, 관계에 피로할 때,

자판기는 묻지도, 평가하지도 않는다.

그저 일정한 온도로 커피 한 잔을 건네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괜찮아. 오늘도 네 몫을 잘 해냈어."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자판기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눈을 마주치듯 셔터를 눌러본다.

감정은 없는데, 묘하게 위로가 되는 존재.


이 도시는 그렇게,

차가운 기계들로 내 일상을 다정하게 감싸준다.


웃기지 않나?

감정선 과잉형 인간인 내가,

감정 하나 없는 자판기에게 위로받고 있다니.


'감정이 없는 기계'에게 위로받는다는 건,

어쩌면 그 기계가 내 감정을 대신 견뎌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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