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수록 윤이 나는 게 있는 법인데
비가 많았던 어느 해. 유례없이 더운 한 해가 될 거란 예보가 있었는데, 그 해는 난데없이 비가 많았다. 기억에 7월 초부터 내리던 비는 거짓말 조금 보태 한 달 내내, 그다음 달도 뚝뚝 내렸다. 중간중간 맑은 날 있었지만, 비는 쏟아졌다 하면 장대비고, 뚝 그쳤다가도 왕왕 몰아치며 내달리듯 내렸다.
도서관에서 점점이 비 내리는 낮은 하늘과 푸른 녹음을 보고 있었다. 비가 와서 미룰 일도, 해야 할 일도 딱히 없었다. 멀리서 까만 봉지 하나가 둥둥 떠서 온다. 뭐지? 자전거 타는 한 할아버지가 까만 비닐봉지를 머리에 봉굿하게 둘러쓰고 내 앞을 스쳐간다. 아?! 저럴 수도 있네, 눈으로 꽁무니를 좇으며 웃었다. 비가 오면 비옷 입고 자전거 타는 걸 한 번은 해봐야지 생각은 있었지만, 비닐봉지는 전혀 새로운 시도다. 무방비로 나갔다가 젖은 후에 하게 될 일이 싫어 새로운 결심조차 생각만으로 그치는, 김 빠진 콜라 같은 일상을 살고 있다.
까만 봉지가 지나고 난 일요일 아침. 비가 갠 참에 오랜만에 자전거를 꺼내 타려고 보니 바퀴에 공기가 많이 빠졌다. 자전거점까지 타고 가긴 무린가, 하고 굴려본다. 페달이 무겁다. 그래도 천천히 내리막을 달린다. 공원 근처에 있는 자전거포에서 공기를 넣으니 날 듯 가볍다. 간 김에 브레이크에서 나는 소리도 한 번 확인해 달래서 간단한 체크도 마쳤겠다, 이제 좀 달려볼까 슬슬 시동을 건다. 나오기 전엔 갈까 말까 미련을 떨어도 일단 나오면 후회하는 일은 단 1도 없다. 인생도 이렇게만 굴러가면 좋을 텐데^^;;
밖에 오래 세워둔 자전거는 공기가 빠지다 여차하다는 바퀴마저 못쓰게 된다. 애들 어릴 때 타던 자전거가 그랬다. 아이들이 다 크자 자전거를 탈 일이 없었다. 어린 날을 품에 안은 채 주저앉아 거미줄만 치고 있는 자전거가 안돼 보여 끌고 자전거포엘 갔다. 공기를 채워주며 아저씨가 말했다. "자전거는 쳐박아두믄 안 돼, 타야지. 앞 바쿠 공기주입구 비틀어지고 타이어 금 갔어. 지금 갈면 돈 드니까 타다가 바쿠 터지면 다시 와." 그러고 보니 이때만 해도 7~8년 전이라 닳았다고 미리 손쓰던 때는 아니었나 보다. 그래도 몇 년은 탔지 싶다.
쓰면 쓸수록 닳는 것이 보통인데, 자전거 바퀴처럼 안 쓰면 닳는 것도 있더라. 무엇이든 용도에 맞게 쓰일 때 빛이 나고, 쓸수록 윤이 나는 게 있는 법인데 안 쓰거나 아끼다 시간에 삭기도 한다. 닳아 없어질 정도면 열심히 썼다는 거니 후회는 없을 테고, 아직 잘 쓰이고 있다면 세심하게 손본다는 거니 또한 용도 배가의 품을 내는 것이다. 쓰고, 닦고, 조이고, 기름칠해야 하는 게 어디 물건만일까. 문득 사람은 세상에게 어떤 쓰임일지 궁금해진다. 나를 어떻게 쓰고 닦고 조이거나 기름칠해야 세상에게 알뜰한 쓰임이 될까. 나이 먹어 점점 느려지고 불편해지는 몸이 세상을 향해 불통을 쏟아내는 날 많아질 텐데….
시동을 걸고 달리다가도 생각의 물꼬가 터지면 한참 느려진다. 낮은 하늘 장대비를 유난히 오래 만난 그해는 유독 '희한하고 황당'했었지. 잔뜩 빠르게 다가오며 어디로 누굴 향해 가는지 모르는 공기는 얼굴의 반을 가리고도 너와 나 사이 거리를 둬야만 서로를 지킬 수 있다고 말했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책임을 묻기도 쉽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으니까. 눈빛만으로는 '너'라는 사람을 대체 읽을 수 없고, 길은 보이지 않았지. 이런 경우는 모두 처음이라고 입을 모았어. 지루할 새 없이 일을 보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입과 코를 가리지 않은 날이면 어느새 옷을 벗은 거 같다고 느꼈잖아, 나만 그랬나.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의 눈을 본다. 마주치기도 전에 스쳐 지난다. 오래 머무르지 않는 방법, 서로에게 닿지 않는 방법, 뭔가 복잡해질 때마다 더 점점으로 나누어지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은 시시각각 변해가는 세상을 따라가느라 바쁘다. 세상의 그림이 되었다가도 탈탈 털어버린 퍼즐조각의 일부로 살아가길 마다하지 않는다. 너나없이 국경을 넘나들며 세상을 그리던 우린 애초 퍼즐의 일부였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지도 없이도 세상 어디나 누빌 수 있는 기계와 정보의 힘이, 눈을 뜨면 천천히 정신이 들기도 전에 정신이 번쩍 나는 뉴스가 넘치는 세상이다.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세상은 차고 넘치는 것들로 현기증 인다.
고무줄을 늘이며 반경을 넓혀 멀리까지 갔다가 손을 잠깐 놓은 사이 내 뺨을 후려치고서야 제자리를 찾은 고무줄에 맞아본 적이 있는가? 나에게 오지 않을 것 같던 고무줄의 끝을 맞아본 적 있는 사람은 순식간에 얼얼하다. 고무줄의 특성 탓에 누구 탓도 할 수 없다. 맞은 사람만 아프게 볼을 비빌뿐이다. 그만큼 얼얼한 세상이 지금도 삼 년 반째 진행 중이다. 이제 곧 이 긴 터널도 끝이 보이지 않을까.
공기만 채우면 닦고 기름칠하고 조여 쓸 수 있는 자전거를 탄 건 이 터널을 건너는 나름의 묘책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바람처럼 움직이는 방법. 할아버지의 깜장 봉지로부터 줄줄 풀려나온 실타래. 오래 기다렸다. 어떤 건 잊혔고, 어떤 건 새로 시작되었으며, 어떤 건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숨죽여.
어쩌다 잊힌 사람이 되어있기도 할 테고, 그간 내다 버린 관계도 있을 테다. 당분간 쓰이지 않을 때가 다시 올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닳고 삭아 사라지지 말자. '나 = 사람'이라는 용도가 세상에게 아직은 쓸만한 존재라는 걸 때때로 살피자. 서로의 온기가 남아있는 한 우린 어떻게든 쓰일 것이다. 적당한 거리로라도 외면하지 않고 있으면 나를 잃진 않을 것이다.
"나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엇이 아닌지는 확실히 안다.
돈과 물건을 아등바등 긁어모으는 것, 유명인의 삶을 살며 주간지 가십난에 오르내리는 것,
외로움과 고요함을 두려워한 나머지 '내가 이 세상에서의 짧은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한걸음 물러서서 스스로 묻지 못하는 것" -1983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우리가 이토록 외롭지 않다면』 중
같이 읽으면 좋은 그림책 :
『적당한 거리』/ 전소영 / 달그림 / 2019
『인생은 단순한 균형의 문제』/ 장 자끄 상뻬 / 열린책들 / 2018
같이 보면 좋은 영화 :
자전거 탄 소년 /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 / 벨기에 / 2011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세상의 용도』 / 니콜라 부비에 / 소동 / 2016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 옌스 안데르센 / 창비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