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바라본다

비가 오는 탓이고.

by 달랑무


그리운 마음으로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해가 지나간 자리에 길게 늘어져 희미해지는 그림자를 담담히 바라보는 것이다, 어둠이 내리면 곧 사라질 여운을. 바람이 불어간 자리를 다시 쓰다듬어 보는 것이다. 비가 내려 질퍽해지거나 눈이 내려 굳어진 땅에 또 서보는 것이다. 해가 떠오르거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올 때마다 어제 같은 날들을 어쩌면, 기다리는 나이가 되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다릴 게 더는 없어서, 어제와 어제, 어제가 또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때 웃음을 주고, 아픔이기도 했던 날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마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지나간 것이 다 그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가 닿았던 날이 해 같았고, 바람과 같아서 그런 날이 마음에 가끔 떠오는 것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봄비다.

처마 끝 떨어지는 빗방울 보며 툇마루 앉아 어머니를 기다리던 날이 이랬지.

감자를 쪄오던 손길은 또 얼마나 뜨겁게 김을 올렸어.


그리움은 티끌 같은 순간으로 지나간 오감들이다. 본 것, 들은 것, 만진 것, 맛본 것, 냄새들의 지나간 순간은 이렇게 언제라도 불어온다. 이제는 볼 수 없는 부재. 들을 수 없는, 만질 수 없는 부재들이 스위치만 켜면 언제라도 불려 나올 준비가 되어 하루를 스쳐 흐른다. 지난 것을 향한 마음이 그리움이다. 지나간 것에게 붙일 수 있는 말 중 '그리움'이라는 말은 최대, 최고의 따뜻함을 지녔다. 오지 않은 것들은 닿을 수 없는 곳이다.


꾹꾹 밟아 땟국 말끔히 빨아 넌 이불이 해 아래 하얗게 말라가는 걸 볼 때,

뜨거운 담장에 척척 올려둔 빨강담요가 숨을 길 없어 어차피 바랠 거라는 걸 알 때,

저녁 어스름이 지기 전에 빨래를 걷으라는 목소리 곧 울리겠지 기다릴 때,

풀 먹인 모양이 그대로 말라 코를 박고 어설픈 날 세우며 서걱서걱 접을 때,

땀에 젖은 머리가 바람에 시큼하게 날릴 때,

남의 집 반찬냄새 진동해도 시장이 반찬이라 내 반찬투정 따위는 어림도 없었을 때,

항아리 고인 물에 장구벌레가 서로 키재기 하며 커가는 양을 두 손으로 떠올릴 때,

뜨듯하게 데워진 물이 팔꿈치 따라 올라 적시다 손을 빠져나가던 때는 모두

지나간 기억 보탠 한 줄 그리움이다.


그리움을 바라본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지나간 마음을 본다. 나를 거쳐 간 기억을 올린다. 미처 말하지 못하고 지나간 것들, 어떤 이유에선지 외면했던 마음 불러 손을 내민다. 실은 오래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진심, 다른 건 몰라도 마음은 따뜻하게 여며 다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아직 남아설까. 그대로 흘러 멀어져 갈 거라는 걸 알면서 잠시 서 있다, 흔들리는 채로. 바람이 부는 탓이다. 비가 오는 탓이고.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이 남은 오늘도 그들이 왕왕 그리워지려 한다, 어느 날에게 그리움이 될 오늘.








같이 그리운 작가 : 박완서

같이 보면 좋은 그림책 : 『이렇게 멋진 날』 / 이수지 그림 / 비룍소 / 2017

같이 보면 좋은 책 : 『시간의 향기(머무름의 기술)』 / 한병철 / 문학과지성사 / 2013

같이 들으면 좋은 음악 : 기억의 향기 / 베이스 손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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