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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 and R Feb 16. 2021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첫째 아들이다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 팀 켈러

한 줄 평: 선행의 동기까지 회개하라


'돌아온 탕자'라는 제목부터 이미 어긋났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두 아들과 한 아버지에 관한 이 이야기는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인가? 과연 이 이야기는 돌아온 탕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이야기인가? 어렸을 때부터 이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여러 번 설교를 들었다. 내 기억으로는 거의 대부분의 설교가 둘째 아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시고 용납해주신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이 말씀이 완전히 틀렸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이 내용에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진리가 들어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한 핵심 내용은 아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하시려는 핵심 메시지를 이 책을 통해 알아가 보자.




당시의 재산 상속 배경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당시 재산 상속에 관한 배경을 살펴보자. 당시에는 아버지가 죽으면 맏아들은 다른 자녀보다 두 배의 유산을 받았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에는 아들이 둘이기 때문에 재산의 3분의 2는 맏아들의 것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둘째의 몫이다. 물론 재산 분배는 아버지 사후에만 이루어진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계신데도 불구하고 유산을 구했다. 둘째 아들한테는 아버지와의 관계보다도 아버지의 재산이 중요했기 때문에 패륜아 같은 요구를 한다. 아버지 재산의 3분의 1을 받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온다.




둘째 아들의 대사 연습

    집중해서 봐야 할 부분이 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가기 전에 아버지한테 어떻게 잘못을 빌고 어떤 말을 할지 준비한다. 쉽게 말해 대사 연습을 한다. 둘째 아들이 준비한 대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 저는 패륜아입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꾼으로 삼아주시면 일을 해서 조금이나마 빚을 갚겠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만났을 때 준비한 대사를 다 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준비한 대사를 시작도 하기 전에 달려가 둘째 아들을 안고 입을 맞춘다. 그 후에 둘째 아들이 겨우 입을 떼서 "아버지, 저는 패륜아입니다."라는 말을 했지만, 아버지는 들을 생각이 없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잔치를 준비하라고 말할 뿐이다. 둘째 아들은 결국 준비한 대사를 다 하지 못한다.


    이 부분이 말해주는 게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개과천선이나 회개의 대사를 읊기 전에 먼저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어떠한 행동이나 말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선행적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첫째가 화를 낸 이유

    그런데 첫째는 왜 화를 냈을까? 우리가 흔히 놓치는 것이 있는데,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첫째 아들의 희생이 필요하다. 아버지의 남은 재산은 전부 첫째의 소유가 될 일만 남았다. 하지만, 둘째를 다시 받아주므로 인해 남은 재산을 다시 분배해서 둘째에게도 나눠줘야 되는 상황이 됐다. 첫째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이다. 결국 첫째가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를 따르고 순종했던 이유도 아버지의 재산 때문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맏아들 또한 둘째와 같이 아버지의 재산을 아버지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둘째와 표현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돌아온 탕자'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라는 말로 이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고 부르는 게 더 합당할 것이다.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모두 잃어버린 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신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면 오히려 '잃어버린 첫째 아들'이라고 해야 더 맞는 제목이지 않을까 싶다.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는?

    이제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를 파악해보자.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문맥을 먼저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하나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시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들어 연속적으로 이야기하신다. 모두 '잃어버린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잃어버린 동전 한 개', '잃어버린 두 아들'(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잃어버린 첫째 아들이 더 합당한 제목)이다.


    양과 동전 이야기는 아들 이야기를 위한 밑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잃어버린 양과 동전 이야기에서는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찾아낸 다음 기뻐한다. 이 두 이야기만 본다면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이고 기쁜 일인지가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잃어버린 아들 이야기에서도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잃어버린 아들' 이야기에는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사람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알아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아들이 둘째 아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첫째 아들의 희생 없이는 둘째 아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유에서 보듯이 첫째 아들은 오히려 화를 낸다. 아버지에게 패륜을 저지르고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산 동생이 돌아와서 자신이 받게 될 재산을 다시 나누는 걸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맏아들이자 형을 대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둘째 아들을 대변하는 '세리와 죄인들'을 포용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야 된다는 게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첫째 아들이 더 위험한 상태이다

    비유에서 형이 동생을 미워하는 것처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미워한다. 형이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께 순종하고 아버지를 섬기는 모습은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열심과 같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생각했고 구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종교적으로 열심을 다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허랑방탕하게 사는 '세리와 죄인들'의 구원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안달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 상태를 보면 당연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첫째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는 둘째 아들을 찾아 나서야 하지만, 비유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 속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첫째 아들도 하나님 아버지보다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떨어질 부산물 즉, 돈과 명예 등을 더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첫째 아들도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첫째 아들이 둘째 아들보다 더 위험한 상태다. 적어도 둘째 아들은 아버지보다 아버지의 재산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반면에 첫째 아들은 자신의 선행과 아버지를 섬기는 모습에 스스로 속아 자신은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우리의 모습이 첫째 아들과 같다면 하나님께 가서 자신의 상태를 고백하고 도와달라고 구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상태에서 아무런 문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아들이 둘째 아들보다 더 위험한 상태다.




예수님이 의도하신 청중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누구를 향하고 있을까?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면 둘째 아들에 자신을 빗대어 생각하고 감정이입을 하곤 한다. '그래 나는 하나님을 떠나 살던 사람이야.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받아주시고 자녀 삼아주셨어.' 맞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떠나 살던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둘째 아들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이 된다.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다. 그리고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주정 헌금과 감사헌금 그리고 십일조까지 최선을 다해 낸다. 교회 청소, 주일학교 교사, 찬양단, 전도대회 등 여러 교회 사역에 동참하며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교회 사역에 쏟아붓는다. 교회 사역에만 열심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선하게 살려고도 발버둥 친다. 이웃들을 배려하고 포용하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자신의 이런 행동의 동기는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팀 켈러는 자신이 신학교에 다닐 때 가르침을 받았던 교수님의 표현을 빌려서 말한다. '바리새인과 하나님 사이를 막는 주된 장벽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의 저주받을 선행이다.' 굉장한 통찰이다. 팀 켈러는 덧붙여 이렇게 말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이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회개해야 한다. 바리새인은 죄만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의 뿌리까지 회개한다.'(117p)




교회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형들의 세상일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자신을 대입해봐야 될 대상은 둘째가 아니라 첫째다. 우리는 다들 교회에 속해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런 믿음을 자신의 의로 여긴다. 나름 선행도 하고 배려도 하고 헌신도 한다. 더불어 교회 밖 사람들을 교회로 초대한다. 그런데 우리의 초대에 힘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우리의 모습이 첫째 아들과 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교회로 초대하지만, 사랑으로 초대하지 않는다. 첫째 아들이 둘째 아들을 미워했던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모르는 교회 밖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싫다. 하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는 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교회가 어지러워질 거라 걱정한다. 괜찮은 사람, 대화가 통하는 사람, 교양 있는 사람만 초대하고 싶다. 이게 진짜 우리의 마음이자 우리가 첫째 아들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팀 켈러는 '우리가 동생들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가 생각보다 더 형들의 세상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41p)고 말한다.




진정한 형이 오셨다

    비유 속의 형은 동생을 찾아 나서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동생을 사랑하는 형이라면 찾아 나섰을 것이다. 자신이 받게 될 재산을 동생에게 나눠줘서라도 동생을 다시 집 안으로 돌아오게 했을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비유 속의 형처럼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그렇기에 진정한 형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은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는 정도가 아니다. 자신의 신성을 포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포기하면서 이 세상 모든 죄를 끌어안으셨다.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가 진정한 형이 되어 동생을 사랑으로 찾아 나서야 하지만, 우리의 성품과 의지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경건의 모양은 흉내 낼 수 있지만, 동기까지 의롭지는 못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정한 형인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그것이 우리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 해결책은 지금부터 힘써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우리가 예수를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믿지 못했다는데서 출발해야 한다.'(1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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