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3년. 학교생활 잘할 수 있을까?
"버스 맨 뒷자리 앉은 사람 누구야?"
허벅지에 딱 붙어서 한 뼘도 안 되는 교복치마를 입은 사람이 교실 한복판에 섰다. 시뻘겋게 칠한 입술 틈으로는 몇 분째 큰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나는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런 상황이 이번 달에만 벌써 다섯 번째였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여전히 심장은 두근거렸다. "버스 맨 뒷자리에는 얼씬도 말라" 며 신신당부를 하며 씩씩거리는 저 사람은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존재인 승애언니였다.
"나현이한테 이야기하긴 했는데, 1학년들 치마 줄이다 걸리면 알아서 해."
한쪽으로 넘겨 실핀으로 고정한 앞머리, 하얀 얼굴과 대조되는 진한 아이라인, 왼쪽 교복 주머니 틈에 보이는 담뱃갑. 입학식날 처음 보게 된 승애언니의 첫인상은 누가 봐도 '무서운 일진언니'였다.
"언니. 걱정 마세요."
"나 진짜 자 가지고 와서 잰다?"
"야. 너네 들었지? 줄이다 걸리면 일단 내 손에 죽는다."
나현이는 우리 반에서 제일 시끄러운 친구였는데, 늘 승애언니와 붙어 다니는 탓에 승애언니를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허구한 날 우리 반에 와서 나현이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모습에 내 고개는 자동으로 숙여졌고, 승애언니가 모습을 드러내면 나는 용수철처럼 교실 밖으로 튀어나왔다.
"재영이 점심 먹으러 왔구나."
"안녕하세요. 친구들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급식 먹는다고 해서..."
교실 밖으로 나온 나는, 올리브를 찾았다. 늘 앉던 가게 구석으로 자리를 잡으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미주이모는 나와 같은 마을에 사는 상원이오빠의 엄마였다. 이모는 낮 시간이 심심하다며 학교 근처에서 '올리브'라는 작은 햄버거 가게를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상원이오빠, 아름이와 함께 놀 때면 맛있는 것을 해주고, 가끔은 나를 애달프게 쳐다보는 눈길에서 걱정하는 마음도 느껴졌다. '미주이모가 우리 엄마였으면...'하고 생각한 적도 많다. 같은 마을에 살다 보니 우리 할머니 하고도 친한 사이였다. 내가 학교에서 겉돌고 있다는 사실이 절대 티가나지 않길 바랐다.
"응. 그랬구나. 학교는 적응할만해?"
"네 뭐 그럭저럭..."
"상원이 학교에서 마주치면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해. 너 잘 챙겨주라고 했어."
이모의 마지막 말에 며칠 전 일이 떠올라 갑자기 목이 꽉 막혀왔다. 상원이오빠는 내가 입학한 공고에 이미 2학년으로 다니고 있었다. 운동장을 걷다가 우연히 상원이 오빠를 마주쳤었다. 낯설기만 한 학교에서 보인 상원이오빠가 반가워서 마음보다 말이 먼저 나왔다.
"오빠! 안녕."
그때 웃고 있던 상원이오빠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제야 상원이오빠 주위에 서있던 친구들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귀 끝에서부터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우물쭈물하던 나에게 상원이오빠가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
"반말하지 마라."
상원이 오빠는 벙찐 나를 혼자 남겨 두고 친구들과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상원이 오빠가 떠난 자리에 "죄송합니다." 하고 읊조렸다. 상원이 오빠와 나는 여덟 살 때부터 쭉 함께 놀아서 한 번도 존댓말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상원이 오빠를 지웠다. 이제 상원이오빠는 내 추억 속에서만 살아있는 존재가 됐다.
"네 이모 감사해요."
상원이오빠 이야기가 또 나올까 싶어, 이모가 가져다준 햄버거를 얼른 한입 베어 물었다. 이제 곧 학생들이 몰릴 거라, 후다닥 먹고 나가야 한다. 내 처지와 달리 햄버거는 정말 따뜻했다. 가게 안 창문에 비치는 햇살도 따뜻했다.
따뜻한 점심시간과 달리 그날 오후 수업은 우울했다. 나현이가 수업시간 내내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선생님이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화를 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대놓고 휴대폰을 하는 나현이에게 휴대폰을 가지고 나오라고 했지만 나현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선생님과 실랑이가 길어졌다. 이 상황에서 아무도 감히 나현이를 말리는 친구는 없었다. 나는 시계만 힐끔대며 학교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교실 밖으로 나왔다.
"다녀왔습니다."
우울한 목소리로 운동화를 벗어던지며 빈집을 향해 중얼거렸다. 한창 농사로 바쁜 봄이다 보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귀가시간이 늦어지던 때였다. 나는 침대로 몸을 던지며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갑자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까지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나를 이렇게 방치할 거면서 왜 공고에 가라고 했을까? 경은이, 현빈이와 늘 몰려다니면서 깔깔대던 순간이 그리웠다. 난 아마 삼 년 내내 이러고 지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친해지고 싶은 친구도 없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모두들 우르르 몰려나가 담배를 피우는걸 몇 번 봤었다.
경은이와 이야기를 나눠야 기분이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왼손으로는 눈물을 닦고, 오른손으로는 컴퓨터 전원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켜지자마자 네이트온 로그인을 했다. 그리고 경은이 이름을 검색했다.
'송경은 - 오프라인'
부푼 기대와 달리 경은이는 오프라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경은이는 늘 오프라인이었다. 요 근래 문자를 보내면 답장도 한참 후에나 왔었던 것도 생각이 났다. 원래 경은이는 나와 대화를 하기 위해 항상 네이트온에 접속해 있었다. 그런 친구가 이렇게 컴퓨터를 못할 정도면, 새 친구와 아주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멍하니 마우스 커서만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컴퓨터를 다시 끄기 위해 본체로 손을 옮겼다.
'안녕.’
그때였다. '디링' 소리와 함께 화면 오른쪽 밑으로 새로운 대화방 하나가 열렸다.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미 컴퓨터 전원버튼을 누른 후라 화면은 금세 꺼지고 말았다. 나는 다시 켤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문자 왔숑-‘
초점 나간 눈으로 꺼진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나는 잽싸게 손을 뻗어 휴대폰을 열었다.
‘여기 너만 한 친구는 없당…ㅜ.ㅜ‘
문자를 보자마자 웃음이 번졌다. ‘그럼 그렇지. 너도 나와 같은 신세구나.’ 기쁜 마음으로 키패드를 꾹꾹 누르며 순식간에 답장을 써 내려갔다. 경은이와 대화를 하니, 그제야 속에 찬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시원해졌다. 그렇게 네이트온 대화는 금세 잊어버리고 경은이와 밤새 문자를 주고받았다. 못본새에 할 말은 잔뜩 쌓여있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안녕’을 다시 켜 보지 않았다. 그 인사가 내 하루를, 어쩌면 내 고등학교를 생활을, 나아가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땐 정말 몰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