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중학교 안녕, 고등학교 안녕?

by 달구비

온몸을 휘감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가만히만 있어도 이빨이 달달 떨릴 정도로 매서운 강추위였다. 나도 모르게 양어깨를 바짝 세웠고, 조금이라도 추위를 막아보기 위해 있는 힘껏 팔짱을 꼈다.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강원도의 한겨울은 사정없이 내려와 꽂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칼날 같았다.


우리 반 반장이었던 미선이가 반 친구 모두를 불러 모은 건 십 분 전이었다. 하도 빨리빨리를 외쳐대는 탓에 경은이와 나는 패딩만 겨우 챙겨, 운동장으로 떠밀리듯 나왔다. 졸업이 임박해 아쉬운 마음이 역력한 2월의 어느 날, 그렇게 우리 반 친구들은 모두 체육관에 모였다.


"일단 다들 의자 셋팅좀 해줘."


키도 작고, 목소리까지 작았던 미선이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애원하듯 이야기했다. 미선이의 손에는 "제52회 졸업식"이라는 글자가 적힌 플래카드가 들려있었다.


체육관에는 곧 2학년 동생들도 모였다. 우리는 창고에서 의자를 꺼내 넓은 체육관 강당을 가득 채웠고, 강당 위 무대에도 의자를 몇 개 셋팅해두었다. 그러고 보니 졸업식이 내일이었다. 체육관 강당을 가득 메운 의자를 둘러보던 내 기분이 이상했다.


논길을 따라 매일같이 걷고 뛰던 등하교 길, 봄이면 뽕잎에서 뽕을 따먹고, 여름이면 삼삼오오 모여 바닷가로 향하던 기억, 누가 더 많은 미역을 줍나 시합하느라 입속은 늘 짠맛이 가득했던 추억. 이제 우리 반 친구들은 모두 속초 시내로 학교를 갈 것이다. 나도 속초 시내에 있는 학교를 갈 성적은 되지만, 여전히 할머니 할아버지는 집 근처 학교를 두고 속초까지 학교를 다니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늬 학교 바로 옆에 고등핵교 아니여?"


담임선생님과 고등학교 진학 상담을 받고 돌아오던 날. 할머니는 내가 건넨 종이를 보지도 않고 이야기했다.


"거긴 실업계야. 난 인문계 갈 성적이 되는데..."

"핵교가 더 거기서 거기 아녀?"

"다르지. 난 실업계 말고 인문계 가고 싶어."


할머니는 방 한가득 쌓인 고추를 행주로 닦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결국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나 속초 시내에 있는 여고 가고 싶어. 인문계 고등학교인데 내 내신으로 갈 수 있대."

"야자 끝나면 집에 어떻게 오게?"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그 늦은 밤에 뭘 타고 널 데리러 가."

"오토바이나 경운기 있잖아."

"재영아. 그냥 고등학교는 할머니 말씀 따라가고, 거기서도 공부는 할 수 있잖아."


엄마가 한숨을 쉬며 난처한 듯 이야기했다.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현실적으로 내가 속초까지 학교를 다니기에는 여덟 시면 끊기는 막차도 문제였고, 그렇다고 누가 데리러 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차도 없는 할아버지에게 경운기라도 타고 속초까지 매일 픽업을 가 달라는 부탁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미 나를 맡긴 것만으로도 엄마는 더한 부탁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결국 나는 며칠을 고민 끝에 내가 졸업하는 중학교 바로 옆에 있는 공고로 가게 되었다.


"네 성적이면 아쉽긴 해."


체육관에 마지막 의자를 셋팅하며 경은이가 말했다. 경은이는 나보다도 성적이 안 좋았지만 속초 시내에 있는 상고에 진학하기로 했다. 경은이 아빠에게는 차가 두 대나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을 가면 되지."


경은이와 학교 앞 매점으로 향하며 대답했다. 어차피 삼 년인데. 차라리 공고 가서 전교일등을 하면 되지. 어쩌면 인문계에서 어쭙잖게 하위권을 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며 마음속으로 나 자신에게 위로를 건넸다.


다음 날. 드디어 졸업식 날 아침이 밝아왔고, 나는 오랜만에 들뜬 기분으로 일어났다. 오늘 졸업식이 끝나고 친구들과 함께 속초 시내에서 놀기로 했는데, 할머니가 용돈을 십만 원이나 줬기 때문이다. 나는 신경 써서 비비크림을 발랐다. 그리고 할머니가 준 용돈을 고이 챙겨 넣었다. 불룩 튀어나온 주머니가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 비록 나와 같은 학교에 가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지만, 그날만큼은 이런저런 걱정을 내려놓기로 했다. 나는 경은이와 미선이, 현빈이와 함께 속초 시내로 가는 내 모습만 떠올렸다. 걱정스러웠던 얼굴에 오랜만에 미소가 번졌다.


"할머니. 꽃다발은 어떻게든 구해서 사 와야 해."


집 밖으로 나서면서 할머니에게 수도 없이 말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꺼냈다. 할머니는 중요한 날만 꺼내 입는 코트를 꺼내 입고는 시장에서 산 초록색 립스틱(바르면 빨간색이 되는 신기한 립스틱이다.)을 바르고 있었다.


"응. 고만 훌레볶으라잉."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할머니가 준 돈으로 지갑을 살 것이다. '메인'이라는 시내의 잡화가게에는 예쁜 지갑과 가방을 정말 많이 팔았는데, 전부 수제다 보니 가격이 비싸 늘 눈으로만 구경하던 곳이었다. 오늘만큼은 구경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참 오랜만에 가져보는 설렘이었다.


'재영아. 일이 바빠 못 가서 미안해. 할머니 통해 용돈 보낼게. 졸업 축하해.'


징징 소리에 휴대폰을 꺼내보니 엄마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요즘 따라 집에 오는 횟수가 영 뜸해졌다. 못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던 터라 아쉽진 않았다. 하지만 답장은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휴대폰을 닫아버렸다.


학교 앞에서 경은이를 만나 우리는 바로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에는 어느새 미선이가 들고 있던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1학년, 2학년 동생들이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나이차이는 별로 안 나지만 내가 엄청 큰 어른이 된 기분 같아서 마음이 우쭐댔다. 몇몇 친하게 지내던 2학년 동생들은 동경의 눈빛으로 우릴 쳐다봤다.


할머니가 사 온 꽃다발은 내가 태어나 처음 받아본 꽃다발이었다. 은은한 세련된 색은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운 색이 가득했지만, 경은이 꽃다발보다는 훨씬 컸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할아버지는 안 올 줄 알았는데 중요한 날마다 쓰던 모자를 쓰고 졸업식 끝자락에 모습을 보였다. 내 어깨를 툭치며 '축하한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런 말을 처음 해본 것처럼 어색한 말투였다. 나도 할아버지한테 칭찬을 듣는 게 거의 처음이었다 보니 어색해서 몸을 베베 꼬고 있는데, 금옥이 이모가 사진을 찍어준다며 셋이 나란히 서보라고 했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나란히 섰다. 그리고 슬쩍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거칠고 따가운 살갗에 놀라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그 틈에 금옥이 이모가 셔터를 눌렀다.


"재영아. 우리 아빠가 속초까지 데려다준 대!"


한창 사진을 찍고 있던 나에게, 경은이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경은이를 따라나섰다.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는 열기로 가득했다. 나는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피하며 경은이를 따라 경은이 아빠차를 찾았다.


"나 엄마가 노스페이스 패딩 사준대."


현빈이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현빈이가 꽃다발을 세 개나 들고 우리를 쫓아왔다. 현빈이는 언니와 동생까지 포함해 총 여덟 식구가 살고 있었다. 현빈이 뒤를 슬쩍 보니 가족들로 바글바글 했다.


"와. 열라 쩐다."

"그치? 미선이네 엄마는 반장 고생했다고 휴대폰 바꿔준다고 했대."

"열라 부럽다."


우리 주위로 깔깔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다 같이 경은이 아빠 차를 타고 가면서도 할 말이 끊이지 않았다. 차가 들썩일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지나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이 나오던 시끄러운 열여섯이었다.


그날 나는 이미 눈여겨봐 둔 마음에 드는 지갑을 샀다. 우리는 롯데리아에 가서 햄버거도 세트로 시켜 먹었다. 그리고는 노래방에 가서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노래까지 1시간 내내 메들리로 불러댔고, pc방에 가서 카트라이더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다. 그 날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 될 정도로 신난 하루였다. 그때는 몰랐다. 앞으로 고등학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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