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소녀의 첫사랑(2)

없는 게 없는 서울,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시골 소녀.

by 달구비

"서가 앤 쿡 갈래?"


큰 이모집에서의 둘째 날은 마침 주말이어서, 셋째 이모의 딸인 다현이가 아침 일찍부터 큰 이모집에 왔다. 나와 나잇대가 비슷한 다현이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깍쟁이였는데 나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 준다며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서가 앤 쿡?"

"응. 파스타랑 스테이크 파는 곳. 언니 안 가봤어?"

"응."


한스델리, 캔모아, 롯데리아. 내가 친구들과 노는 곳은 고정된 것처럼 세 군대 뿐이었다. 몇 푼 안 되는 용돈으로는 달리 갈 데도 없었다. 역시 서울인 건가. 다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학생들도 갈 수 있는 파스타집을 찾았다. 파스타는 몇 번 먹어보지 못해서 기대가 됐다. 나는 태현오빠 방을 힐끔거리며 겉옷을 주워 입었다.


민수오빠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새벽같이 일어나 태현오빠의 방문 앞을 기웃거렸다. 굳게 닫힌 방 문이 마치 강원도 고성 끝자락에 사는 나의 현실 같았지만, 그 순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민수오빠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나의 마음이었다. 되던 안되던 그 잘생긴 얼굴을 한번 더 눈에 담고 싶었다.


"언니 우리 지금 나가야 돼."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다현이가 빠르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할머니가 재밌게 놀고 오라며 빳빳한 새 돈을 챙겨줬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두 손에 할머니가 준 돈을 꼭 쥐고 다현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집 밖을 나서서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자마자 버스정류장이 나타났다. 고성의 우리 집과 다르게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는 게 신기하고 부러웠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여러 대가 한꺼번에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다현이는 아무거나 타도 다 간다며, 들어오는 버스 중 어떤 걸 타겠냐며 나보고 고르라고 까지 했다. 버스 한번 타려고 논길을 걷고, 뛰고, 한참이나 버스를 기다리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서울은 달랐다. 버스정류장엔 사람이 들끓었고, 버스가 끊임없이 승객들을 태우고, 내려주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학생입니다.'


다현이가 돈통에 돈은 안 넣고 뭔가를 갖다 댔다. 나는 당황하여 다현이를 쳐다봤다.


"언니 버스카드 없나?"

"그게 뭐야?"

"일단 내가 찍을게. 아저씨. 한 명 더요."


다현이가 내 뒤로 늘어선 사람들을 힐끔대며 다시 한번 뭔가를 갖다 댔다. 그러자 또다시 '학생입니다.' 하는 안내 음성이 나왔다. 나는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천 원짜리 한 장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다현이가 빈자리에 올라타며 버스카드를 알려줬다. 어른들이 들고 다니는 카드 같은 것에 미리 돈을 충전하고, 버스를 탈 때 돈대신 카드를 찍는다는 것이었다. 짤랑거리며 돈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럭셔리함을 선택한 서울이 참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좋겠다."

"왜?"

"버스 정류장도 가깝고, 안기다려도 되잖아."

"그런가? 오래 기다려본 적 없긴 해."

"그러니까 좋겠다."

"이런 게 뭐가 좋아. 피아노 바꾸는 게 좋지."


다현이가 관심 없다는 듯 최신폰인 DMB폰을 누르며 말했다. 다현이는 피아노를 전공해서 콩쿠르도 많이 나갔는데, 가끔 네이트온으로 대화하면 피아노를 바꾸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통화하는 걸 들었던 기억에 의하면, 셋째 이모부가 작년에 피아노를 바꿔준 걸로 알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배부른 소리 하네.'라고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높은 건물 틈으로 재빨리 움직이는 사람들. SM에서 새로 데뷔한다는 소녀시대의 포스터가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영화관도, 백화점도 참 많았다. 학생들은 스티커 사진관 앞에 상기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서울에 살면 심심할 틈은 없을 것 같았다. 서울은 그야말로 생기가 넘쳤다. 트랙터소리와 경운기소리만 울려 퍼지던 조용한 내 동네가 떠오르자 우울해졌다.


자리에 방금 앉은 것 같은데 다현이가 다 왔다며 나를 잡아끌어내렸다. 시내 한번 나가려면 족히 20분은 달려야 하는 고성이랑 서울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모든 것이 빠르고 풍족해 보이는 서울은 마치 '너에게 여긴 어울리지 않아.'라고 으스대는 것 같았다. 나는 다현이를 따라 잰걸음으로 걸으면서도 눈은 바쁘게 움직였다.


"언니. 나 반윤희 아디다스 카드지갑 하나만 살게."


다현이가 멀리 보이는 아디다스 매장으로 빠르게 걸으며 말했다. 나도 반윤희 미니홈피에서 봤던 거라 다현이를 쫓았다.


아디다스 매장 안에는 반윤희가 썼던 모자, 카드지갑, 그리고 운동화까지 있었고 우리 또래 학생들도 참 많았다. 속초시내에는 아디다스 매장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학교 컴퓨터실에 모여 g마켓을 들락거렸었다. 시골에 택배가 오지 않아 구매는 못했지만 서울은 역시 달라도 한참 달랐다. 다현이는 한참을 구경하다가 파란색 카드지갑을 샀다. 내가 아니라 다현이 목에 걸려있는 카드지갑이 하얀 얼굴과 참 잘 어울렸다.


"언니 우리 태현오빠도 나오라고 할까? 친척들끼리 뭉쳐야지."


다현이가 들뜬 목소리로 태현오빠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내 가슴은 요동쳤다. 나는 최대한 티 내지 않기 위해 "그래." 하고 무심한 듯 대답하며 일부러 다른 곳을 쳐다봤다. 태현오빠가 알아서 민수오빠와 함께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감에 내 가슴은 점점 빠르게 뛰었다.


"문자 보내놨어. 언니 우리 스사 찍으러 가자."


서울의 스티커사진관에는 소품도 훨씬 많았고, 사진 배경 필터도 다양했다. 입구에서부터 우리 또래 여자아이들이 들끓었다. 나는 다현이와 토끼머리띠를 쓰고 스티커사진을 찍었다. 근데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태현오빠가 오는 건지 아닌지 내 마음은 그 생각뿐이었다.


"다현아. 태현오빠 답장 왔어?"

"어? 잠시만."


다현이가 틴트를 바르며 dmb폰을 꺼냈다. 문자가 왔을지도 모르는데, 확인도 안 하고 있던 다현이가 얄미워 보였다.


"태현오빠 못 온대. 친구랑 약속 있다는데? 치수. 배신자."


다현이가 이번엔 파우더를 두드리며 입을 삐쭉거렸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다현이의 휴대폰 액정 화면을 슬쩍 쳐다봤다. '나 친구랑 약속 있삼.'이라고 써져 있는 글자를 몇 번이고 쳐다봤다.


다현이와 서가 앤 쿡에서 파스타를 먹으면서도,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면서도 내 마음 구석으로는 민수오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 마음은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름도 얼굴도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성의 집으로 다시 내려가서도 민수오빠가 그리워 매일 일기장에 이름을 가득 채웠었는데 나에게 지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칙칙하기만 했던 내 마음을 따스히 물들여주던 서울의 멋진 오빠가 지금쯤 어딘가에서 잘 살길 바라며...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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