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소녀의 첫사랑(1)

시골소녀의 마음을 설레게 한 도시오빠.

by 달구비

"여가 터미날인가 뭐인가 그거여?"


할머니가 일주일 전부터 사둔 멀미약을 나에게 건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속초 시외버스 터미널'이라는 글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코를 막고 멀미약을 삼켰다. 씁쓰름한 액체가 목 끝에 닿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러졌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쳐다도 보지 않고 키미테를 내 귀 밑에 붙였다.


할머니는 열여덟 순정을 할아버지에게 바쳤다. 그리고 그 순정의 결과는 곧 딸 다섯, 아들 둘인 칠 남매의 엄마로 이어졌다. 자식들을 분가시키고 시집 장가까지 전부 보낸 할머니는 서울에 사는 이모, 삼촌들을 늘 보고 싶어 했다. 그러던 와중 큰 딸인 큰 이모의 반가운 전화를 받은 건 몇 달 전이었다.


"원경이가 시집간다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린 큰 이모의 딸, 사촌언니 원경언니의 결혼소식을 기점으로 할머니는 매일 조금씩 시간을 내서 서울로 갈 준비를 했다. 옷장 위에 올려둔 커다란 가방을 꺼내 내 옷과 할머니 옷을 담았다. 그리고 한 달 전부터는 방앗간을 들러 고춧가루를 빻아 비닐에 담고, 옥수수와 고구마도 박스가 묵직해지도록 담았다. 이에 질세라 할아버지는 정미소를 들락거렸다. 나올 때마다 묵직한 쌀포대는 덤이었다.


"할머니. 우리 자리 여기야."


서울로 가는 날 아침, 할아버지의 트랙터에 세 식구가 몸을 실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나를 터미널에 내려주고는 바삐 논으로 갔다. 나는 터미널 입구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할머니 옷깃을 잡아끌고 '동서울' 행 버스 좌석을 찾아 앉았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상기된 표정으로 창밖을 살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서울. 티비에서나 봤지 실제로 가보는 건 처음이다 보니, 긴장되는 마음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갑자기 아름이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라 눈이 더 말똥거렸다. 서울 친척집 앞 놀이터에서 길을 잃어 한참을 헤맸다는 무서운 이야기였다. 나는 엄마가 사준 MP3의 볼륨을 높였다. 그리고 노래가사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동서울행 도착입니다."


버스는 할머니와 나의 부푼 마음을 싣고 두 시간 남짓 달려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했다. 기사님이 장갑을 벗으며 인사를 하자, 승객들이 천천히 버스에서 내려갔다. 나는 내리자마자 버스 옆면 짐칸에 실린 자루를 꺼냈다. 그때 감자 한 알이 자루 틈에서 튀어나와 데구루루 굴러갔고, 나는 황급히 뛰어가 감자를 주웠다. 뒤따라 나온 기사님은 아직 짐칸에 남아 있는 쌀포대를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모는 어디래?"

"차가 막힌다나 어쩐다나..."


할머니는 자루를, 나는 쌀포대를 붙들고 터미널 구석자리에 섰다. 처음으로 마주한 서울의 모습은 정신이 없었다. 터미널 주변을 에워싼 커다란 건물은 무서웠고, 찻길에 늘어선 차에서는 쉴 틈 없이 경적소리가 울렸으며, 사람은 또 어찌나 많은지 우리 동네 사람들을 합친 것보다 몇 배는 많아 보였다.


"엄마, 재영아. 오느라 고생했어."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이모가 도착했고, 우리는 큰 이모 차에 타고 이모네 집으로 갔다. 큰 이모는 결혼하면서부터 서울에 횟집을 차렸는데 위치와 홍보 덕분에 장사가 엄청 잘됐었다. 이모네 횟집은 해가 넘어갈수록 사람이 많아져 확장이전까지 했고, 이모는 이전하던 날 강남 한복판에 큰 아파트를 샀다. 할머니가 이모와 통화하는 소릴 듣고 꼭 가보고 싶었던 터라, 아파트로 가는 길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모네 집은 상상 속 모습보다 훨씬 좋았다. 널찍한 거실은 우리 동네사람들이 다 누워도 남을 것 같았고, 구석에 있는 피아노는 드라마에서만 보던 거였다. 나는 조심스레 건반을 눌러봤다. 청아한 피아노 소리가 큰 집을 따스하게 감싸는 것 같았다.


"할머니 오셨어요?"


사촌오빠인 태현오빠가 방에서 나오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보는 오빠가 어색해 몸을 베베 꼬며 "안녕." 하고 중얼거렸다. 슬쩍 보이는 태현오빠의 방은 내 방 세 개를 합친 크기였는데, 컴퓨터는 두대나 있었고, 노트북, 기타, 게임기가 한쪽벽에 쌓여있었다. 힐끔대는 내 뒤로 큰 이모가 구경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한 발짝 발을 들였다. 그와 동시에 태현오빠가 어떤 남자와 뒤따라 들어오며 생긋 웃었다.


"재영이가 몇 살이었지?"

"열여섯 살."

"아 맞다. 나랑 네 살 차이였지? 내 친구랑 같이 카트라이더 할래?"


태현오빠와 따라들어온 남자가 "같이하자."며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꼼짝할 수 없었고 시간이 멈춘 듯했다. 태현오빠 친구인 민수오빠는 얼굴이 하얗고 피부가 좋았는데, 살짝 웃을 때 보이는 반달 눈웃음에 내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몸에서 나는 은은한 섬유유연제 냄새는 겨울에 꺼낸 솜이불처럼 포근했다.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민수오빠귀에 들릴까 봐 애꿎은 헛기침만 계속 해댔다.


태현오빠와 나는 컴퓨터로, 민수오빠는 노트북으로 카트라이더를 했다. 우리는 팀전을 했고 나는 민수오빠에게 잘 보이고 싶은마음에 연이어 1등을 했다.


"재영이가 잘하네."


민수오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황급히 숙여야 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간질간질한 감정이 좋았다. 민수오빠는 다정했다. 잘생겼고, 냄새도 좋았다. 이모네 집에서 살면서 자주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는 깔깔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레이싱을 즐겼다.


그날 저녁. 해가 지자마자 민수오빠와 태현오빠는 약속이 있다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밥상을 차렸다. 큰 이모는 갈비찜과 잡채, 그리고 생선과 소고기를 구웠고 근처에 사는 둘째 이모와 셋째 이모도 시간 맞춰 도착했다. 평소에 없어서 못 먹었던 고기와 갈비가 있었지만 민수오빠 생각에 젓가락질이 느려졌다. 밥알을 세면서 민수오빠의 냄새를 떠올렸다. 멋있는 반달 눈웃음도.


"재영이 입맛 없어?"

"아, 아니에요."

"너 고기 좋아하잖아. 많이 먹어."


둘째 이모가 내 앞으로 갈비찜을 갖다 대며 말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갈비찜을 뒤적거렸다.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에 젓가락질은 여전히 느렸다. '민수오빠 휴대폰 번호라도 물어볼까?',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싶다고 해볼까?'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일단 서울에서 사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횟집 운영으로 바쁜 큰 이모가 날 키워줄리 만무했다. 휴대폰 번호를 물었다가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저런 대안을 생각하느라 내 생애 제일 긴 저녁 시간을 보냈다.


밥상을 치우고 아홉 시도 안 됐는데 할머니는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다. 큰 이모도 피곤할텐데 일찍 자라며 방으로 들어갔다. 불꺼진 집은 더욱 커다랗게 보여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태현오빠는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태현오빠가 민수오빠와 같이 들어올까 싶어서 자꾸만 거실을 어슬렁거렸다. 그렇게 첫 서울 나들이의 애타는 첫날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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