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나로 1 [기억]

기억의 시원: 그곳엔 늘 지옥이 있었다.

by 달결

난 내 기억의 처음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아무리 손을 뻗어 보아도 손끝에 걸리는

기억들은 깨진 유리 조각처럼

단편적이고 날카롭다.

작은 기억조차 나를 상처 입힐 것 같으면

서둘러 지우고 도망치던

나약한 버릇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숨을 고른다.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사진첩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린다.

이 낡은 종이들 사이에 내가 버리고 온

조각들이 숨어 있을까.


여전히 나는, 상처투성인

나를 마주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버겁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면서도,

누구보다 나를 거부하고 싶은 지독한 모순.

그것이 나의 본모습이다.


그런 나를 굳이 드러내려 한 이유가 뭘까.

난 여전히 상처에 약하고

그 모습이 두려운 겁쟁이인데.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는 초대하지 않은

불편한 손님이 찾아오곤 했다.

시작점이 언제인지도 모르게 나타난

그 감정은 한 번씩 불쑥 찾아와

헤어 나오기 힘든 나락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 도망치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했지만 끝내는 잠식되어

온몸을 웅크린 채 그 시간이 지나가길

버티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도 살아가다 보니 괜찮았다.

그래서 이겨낸 줄 알았다.

정말 괜찮아진 거라 착각했다.

평소엔 그 사실조차 잊을 만큼 잠잠했다.

"드디어 해방이구나, 드디어 자유구나."라며

안일한 안도를 하기도 했다.


몇 년 동안 숨죽이고 있던 그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평범한 하루 속에 갑자기 찾아오는

이 감정의 이름을 나는 여전히 모른다.

어디서 온 것인지,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더 두렵다.


창밖의 햇살은 무심하리만큼 생생한데,

방 안의 나만 멈춰 있는 기분이다.

아니, 모두가 살아 숨 쉬는 세상에 나만 홀로

허공에 발을 띄운 채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기분이다.


처절한 외면. 누구로부터.

타인 그리고 나로부터.

그것은 고요한 일상을

순식간에 지옥으로 끌어내린다.

예고도 없이 찾아와 허무하리만치 쉽게

‘과거의 나’로 돌려놓는다.


모든 날이 아픈 것은 아니었고,

분명 행복의 틈새도 존재했는데,

왜 나는 그 모든 날을

기억하는 것조차 힘겨운 걸까.

과거가 되어버린 어제는

왜 나에게 고통으로 남는 걸까.

지금에 와서야 굳이 이 해묵은 통증을

다시 돌아보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살아야 해서, 나로.

그럼에도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