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입사 전 나는 경북 상주에서 근무하다 온 신규 임용자로, 처음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했다. 검사를 해야 하는 신규 임용자들에게는 출근 전 1주일 동안 음성결과를 받아오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양성이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출근 전에 가도 긴 줄, 퇴근하면서 가도 긴 줄이라 사람 없을 때 와야지 하는 마음은 일찌감치 내려놓고 핸드폰 화면을 툭툭 누르면서 줄을 서 있던 중, 낯선 광경을 목격했다. 보호자로 보이는 딸은 뭐라고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환자로 보이는 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아 빨간 피를 수혈받으며 선별 진료소에서 검사 대기를 하고 있었다.
‘밖에서? 휠체어에 앉아서 수혈을......?’
“구미에서 왔다고 코로나 검사받고 오라고 해서 응급실 못 들어간 지가 몇 시간인지 아세요, 구급차 타고 몇 시간을 오는 것도 힘든데 이러다가 쓰러지시면 책임지실 거예요.!” “우리 아빠, 암환자예요!!!”
2020년 2월 27일 추웠던 겨울, 처음 본 낯선 광경이었다.
전에 없던 광경과 내 콧속을 찔렀던 검사가 코로나바이러스를 실감 나게 했다.
마스크를 쓰고, 손 소독을 하고 병원 입장 시 간단한 증상 체크 및 열체크가 진행되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병원 지침 상 환자의 보호자는 1명만 상주 가능하였고 연일 코로나바이러스 예방에 대한 원내 방송이 나왔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을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모시는 574병동의 59호실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병원 내원객을 통제하고 상주 보호자를 제한하는 것이 병원 내부의 엄중한 규칙이 되다 보니 임종을 맞는 환자들에 있어 “임종을 지킬 수 있는 보호자 수”에도 제한이 생겼다. 가족이 많은 환자들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었지만 죽음에도 예외가 있을 순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은 다인실보다는 1인실인 임종실에 그나마 몇 명이라도 보호자가 더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최근 아버지의 임종이 임박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부랴부랴 귀국한 아들은 한국 귀국 후 자가격리 기간 중, 아버지가 임종했다는 비보를 전해들어야 했다.
“엘리베이터 한 칸을 완전히 비우고 방호복 입은 아들을 엄호해서, 일단은 누구도 컨택하지 못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들이 내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바야흐로 임종을 맞이하는 가족을 보기 위해 미국에서 황급히 귀국하더라도 만나기 쉽지 않은 때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생활을 바꾸었다.
이틀 전 두 번째 코로나 검사를 했다.
일을 하다 콧물을 찔찔거리고 재채기에 기침을 하자 직장동료들로부터 선별 진료 소행을 안내받았다.
그날은 유난히 눈도 풀리고 기침이 심했다.
“저 원래 알레르기 비염 있어요.”라고 항거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저 아이 내일 등원시켜야 돼요,”
“저희 애기도 이제 7개월이라서... 애기가 어려서요.....”라고 장난의 말들이 되돌아온다.
사실 내가 감기에 걸려 힘에 부쳐 보이자 검사받고 쉬라는 동료들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선별 진료소로 향하며, 최근 읽은 책의 한 문구가 떠올랐다.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미리 조심하는 것이 좋다는 오랜 격언을 명심할 시기다.”
"미리 조심하자"라는 모토 하에 낯선 모습들과 낯선 반응들이 점점 뉴 노멀이 되어 가는 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