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후세계에 대한 관점
결정과 선택을 옳게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건 바로 ‘내 관점’으로 세상살기입니다. 홍세화씨가 미리엘 주교의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갔던 것처럼 말이죠. 많은 분들이 들어본 말일거라고 생각해요.
내 관점이 없으면 우리는 선택한 후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타인의 방식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자성어 새옹지마 속 변방노인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관점이 있었습니다. 없었다면 아들이 말에서 떨어져 불구가 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처럼 반응했을 거예요. 일희일비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관점은 꼭 필요한 것, 결정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잘 결정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최근 그것을 다룬 책 <결정수업>을 보았습니다. <결정수업>의 저자는 여러방법들 중 하나로 원근법을 활용한 의사결정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그나티우스의 <영성 수련>과 칩 히스와 댄 히스의 공저 <자신 있게 결정하라>(웅진하우스 역간)의 내용을 언급하는데요. 두 책에서는 공통적으로 '선택을 할 때에는 나와의 적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히스 형제가 말한, “결정하기 전에 거리를 확보하라”를 소개하며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질문법을 소개합니다. 그 질문법은 미국의 비즈니스 저널리스트 수지 웰치가 고안한 10-10-10 방식으로 이렇게 질문해보는 겁니다.
이 결정을 내리고 나서 10분 뒤에 나는 어떤 느낌 일까?
10개월 뒤에 나는 어떤 느낌일까?
10년 뒤에 나는 어떤 느낌일까?
저자는 “이런 방식으로 결정에 영향을 주는 ‘단기적’ 감정을 중장기적 감정이 일어날 시점에 갖다 놓음으로써 ‘단기적’ 감정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저자의 이런 제안에 십분 공감합니다. 다만 이 내용에 보태어 수지 웰치의 질문을 결정에 잘 활용하려면 각자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와의 거리두기를 위해서도 관점은 필요하다고 말이지요.
나 ------------------- 관점 --- 결정
돈에 대한 관점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와 남편은 돈을 보는 비슷한 관점이 있는데요.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돈은 어차피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기쁜마음으로 돈을 쓰면(기부하거나 부모님께 드리면) 그 돈은 알아서 가치를 갖게 된다.
내가 취미에 돈을 쓸지말지 또는 양가부모님께 여행 경비를 드릴지말지를 판단 할 때 나만의 관점을 통해서 정하면 크게 고민되지 않습니다. 당장의 나는 돈이 아깝고 주식을 사두면 10년 후에는 더 가치가 있을텐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위에서 말한 ‘관점’을 통해 결정했기 때문에 10분 뒤, 10개월 뒤, 10년 뒤 나는 어떤 느낌일까를 떠올리면 일관성있게 '괜찮다'라는 느낌이 듭니다.
내 관점을 통해 나와 그리고 세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통해 정한 것이므로, 이 결정은 ‘나중에도’ 괜찮았던 판단으로 결론지어질 수 있습니다.
<결정수업>의 저자는 이 방법에 더해 이그나티우스의 <영성 수련>에서 제시하는 세 번째 기술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있다’고 상상해보는 것입니다. 결정을 할 때 ‘자신이 내일 당장 죽는다’라거나 ‘3개월 시한부선고를 받았다’라고 상상해보라는 문장들도 자주 보셨을 거예요. 생이 끝난다고 가정해보고 결정하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에서도 역시 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여러 관점들 중 ‘사후에 대한 관점’ 말이예요.
내가 사후 세계를 어떻게 조망할 것인지에 따라, 죽음의 문턱에 선 내가 나의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삶은 심장이 멎는 순간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죽기 전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내용은 크게 다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루는, 즉 돈이나 성공을 바라보는 관점을 세우는 것 만큼 죽음이나 영혼, 사후세계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후에 대한 관점에 따라 내가 죽음앞에 이르렀을 때, 생전에 내린 결정이 괜찮았는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니까요.
이런 이유로 죽고사니즘에 대한 나만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000즘이란 말이 거창해보일지 모르겠어요. 저는 브런치북 <임종방 찬가>속 글들을 통해 ‘어떤 장소에서, 누구에게 둘러싸여 죽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사람들이 홀로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임종 장소에 대해서는 타협하고 싶지 않은 뾰족한 시각을 가지고 있지요. 다만 제 생각만이 옳다기 보다는 제 관점을 알게된 타인이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점검해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큽니다. 각자가 숙고를 통해 이러이러하므로 나는 병원에서 혼자서 죽어도 괜찮아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면 그것 또한 존중합니다.
만약 당신이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해왔음에도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면, 죽고사니즘을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병원 또는 집, 어디에서 죽을것인가에 대한 것부터 사후에 대한 관점까지 말이예요. (종교를 가지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 역시 종교가 없으며 ‘결정’에 대한 고민이 사후에 대한 관점을 가져야겠단 생각으로 이어졌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내 선택과 결정들이 결국 나를 만든다면 그 결정에 필요한 것은 나만의 시각이겠지요? 그것들이 모여 내가 되어가므로, 내 가치관을 점검하고 관점을 쌓는 것에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관점들을 부지런히 ‘통일성’있게 꾸려 나만의 세계관을 이루어나가는 것은 참 멋진 일입니다. 관점들로 세계관을 꾸리려면, '통일성'을 빼놓을 수 없기에, 세계관을 만들어 나가는 일은 나의 찌글찌글한 모순들과 투쟁해나가는 것이라 생각해요.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내 관점들을 일관성있게 운용하는 것은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 작업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지금 내 결정이 10년 후에도 옳으리라 장담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내 통일된 관점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선택과 결정을 위한 단발적인 기술을 찾기보다는 자신의 관점을 찾고 쌓아가는 것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일상에서 결정을 잘하고 싶은 저는 생과 사에 대한 제 관점들을 두루 살펴볼 생각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각자의 세계관을 축소하고 확장하다 그 교차점에서 만나며 또 만나겠지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사후세계에도 회합점이 있을지 말이예요. 나중에 또 만나면 바샤 커피를 대접할께요. 요즘 제가 제일 맛있게 먹고 있거든요.
브런치북, <없어요, 가슴 뛰는 그런 일> 연재를 종료하고, 매거진을 통해 뵙겠습니다! 글을 읽는 당신께 복복, 떠블복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