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성에 저항하는 힘
코노력은 음치남자가 코인노래방에 가자고 했을 때 기꺼이 응하는 힘이다. 그것은 효율성에 거부해 보겠다는 의지이지도 하다.
음치남자, 남편의 애창곡은 ‘너의 꿈속에서’이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삽입곡인 그 노래를, 배우 한지상이 부르는 것을 보고 반했다고. 그는 늘 노래의 마지막 구절 ‘살고 싶어’를 긴 호흡으로 내지르는데, 그 모습은 요즘에도 압권이다. 높은 단상에 선 듯 몸을 쭉 빼고, 하늘의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것처럼 양손을 허공에다 몇 차례 휘젓다가, 주먹을 불끈 쥐는 그 모습이.
한 때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자가치료를 하고 있나' 생각하기도 했다. '결점을 드러내서 그것을 극복하겠다'라던지 '두려움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겠다'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노래 부르는 것이 그에게는 실험적인 치료법이 아닐까 했었지만, 그를 만난 지 10년이 지나고 보니 그에게 음치는 '결점'의 범주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는 노래 부르기에 대해 두려움도 애착도 없는 그런 상태였다.
이전글에서는 그런 그의 ‘해탈한 것’ 같은 매력이 그에게 청혼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로맨틱하게 마무리했지만, 나는 그를 얻었고 우리에겐 두 명의 아이가 생겼다. 이제 노래방에 가서 그의 노래를 듣는 것은 자본주의를 사는 나에게 더없이 효율 없는 일이 되었다. 내게도 다른 관심사가 생겼고 그것들에 투자하기에도 시간은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코노갈래?라고 물으면 두 말 않고 따라나서는 이유는, 내가 따지는 ‘효율’이 가족관계를 자주 망쳐놓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어서다. 그렇다. 가족들 사이에서 늘 문제를 일으키는 배후에는 ‘효율을 따지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집단 무의식 같은 그런 것이다. 그 무의식의 소용돌이 속에 우리 가족도 있었다.
과거 우리 엄마와 아빠는 늘 비슷한 이유로 다퉜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더 빠른 A길로 가지 않는다"며 아빠를 타박했다. 그렇게 시작된 말싸움은 곧 다른 문젯거리들을 끌어들였고 끝나지 않는 싸움으로 이어졌다. 가족 여행을 가서는 숙박이든, 식사든 가성비를 챙기지 못하면 계획한 그 사람은 어김없이 욕을 먹었다. 시간대비 또는 가격대비 우월하지 못하거나 생산적이지 못한 결과는 ‘나쁜’것으로 치부됐다. 어렸을 땐 효율적이지 못한 것으로는 다투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점점 그 것이 당연치 않아졌다. 그런 마음은 사람을 효율성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누어, 수단으로 대하는 것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아닐지.
그렇기에 어찌 되었던 우리는 자주 코인노래방에 간다. 음치남자의 열정을 엿보고 마구잡이로 노래를 부르고 나면, 모종의 힘이 생기기도 한다. 그 힘으로 글도 더 잘 써지고 아가와도 재밌게 놀 수 있는 것 같다. 효율은 없다지만 심리적 효용은 최대로 달성된다. 경제적 효율성이 좋지 않은 것에서는 그로 말미암은 심리적 만족이라도 노려보겠다는 얄팍한 심산이다.
심리적 효용을 노리는 내가 아쉽다. 경제적 효율도 심리적 효용도 모두 내려놓고, 자신과 가족을 그저 목적으로 대하는 것은 아직 요원하다는 반증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