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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Jun 25. 2024

임종전문병원을 만들겠단 결심

임종방찬가, 못다한 이야기 

<임종전문병원 전격 오픈>

강력한 방음으로 가족이 모두 모여 찬송가를 부르거나 염불을 욀 수 있습니다. 입원실 모두 1인실로 구성! 성직자분들의 방문도 가능합니다.


몇 해 전 적어둔 일기를 발견했다. 한 페이지에 내가 만들고 싶은 병원의 홍보문구와 병원의 구조가 적혀있었다. 뒷 페이지에 암병동 수간호사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도 보였다. 임종방과 그 방으로 들어가는 환자들을 귀하게 생각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어휴 선생님, 아까 임종방에 들어가서 찬송가 작게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앞 병실 보호자들이 자꾸 컴플레인을 해서요..."

"지난번에도 비슷한 일 있었던 것 같은데... 중간에 들어가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고생하셨어요."


수선생님과의 대화 이후, 환자의 가족들 중 누군가가 목사님이나 스님을 임종방으로 모셔와도 되냐고 물으면, 나 역시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능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내 눈은 불안감으로 흔들렸다. 종교를 막론하고 성직자분들이 진행하는 의식에는 보통 큰 목소리가 뒤 따랐기 때문이다.(코로나 이후 원내 상주 목사님이 원하는 분들에게 방문해 조용히 기도 해주시는 것으로 바뀌었다)


정말 죽을 때까지 남 눈치 보게 하면 쓰겠냐고?

내가 임종전문병원 만들면 방음 진짜 빵빵하게 해야지.

나는 일기장에 온갖 성토를 하고 있었다. 임종전문병원을 만들어 철저한 방음장치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문장도 보였다.


방음이라는 단어 옆에 빨간 별표를 세 개나 쳐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보호자 A가 생각나서였다. 임종방으로 어머니를 옮기고 시종일관 묵묵히 앉아있던 환자의 아들 A가, 임종선언을 한 직후 엄마를 잃은 송아지처럼 울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는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보아 목소리 조절하는 법을 잊은 듯했다. 그날 그를 위해서라도 임종방에 방음벽이 설치되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진: Unsplash의Alen Kajtezovic

A의 어머니, 내 환자였던 그녀는 90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산화탄소혈증으로 정신을 잃기 전까지 그녀의 의식은 명료했다. 전이암이 빼곡하게 번진 환자의 양쪽 폐를 엑스레이에서 보았던 나는, 그녀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일말의 숨을 허락해 주어 고마웠다. 고유량 고압 산소를 코에 걸고 있었지만 그녀의 숨으로는 한 문장을 제대로 말하기 어려웠다. 단어와 단어를 끊어가며 말하면서도 그녀가 나에게 반복해서 말했던 문장은 하나였다. 우리 애한테 내 아들이어서 고마웠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엄마와 아들 사이에 어떤 서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언 같은 그 말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를 만나고 난 후 아들을 따로 만나 면담했다. 면담을 위해 필요했던 서류에 아들이 적은 생년을 보았다. 어림잡더라도 65세가 넘은 그 역시 노인이었다. 또한 그는 할머니가 말했던 그 문장 속, 우리 애였다.


그는 면담을 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다른 보호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내 말을 듣고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어머니가 정신을 곧 잃을 확률이 높고, 정신을 잃으시면 깨어나기 어렵다고 설명드렸다. 그리고 그때가 어머니를 임종방으로 모실 때라는 말도 함께. 면담이 끝날 때까지 어깨를 옹송그리던 그였다. 그가 살면서 움츠린 어깨를 펴본 적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내 아들로 와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지도 모른다.


임종방으로 어머니를 옮기던 날, 그는 나에게 처음으로 물었다. 이 방에서 무엇을 해야 하냐고. 이 질문은 꽤 자주, 거의 매번 보호자들이 내게 묻는 질문이었다. 그에게 말했다.


"어머님이 의식이 없는 것 같지만 다 듣고 계시니, 임종하시기 전까지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울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전하는 문장은 늘 두 가지였다. 같은 공간에 계실 때 가능하다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세요. 그리고 환자 앞에서 울지 마세요.


실은 나도 두 번째 문장을 보호자들에게 말하기 전까지 한참을 생각했다. 조심스러웠다.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일까?  무엇보다 죽어가는 환자를 앞에 두고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보호자들은 잘했다. 잘 해냈다. 그 문장에 이어진 나의 부연설명을 듣고 난 그들은, 눈물이 나오려 할 때 이를 악 무는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함께 하는 이 하루를 울다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돌아가시고 나면 그때 이 얘기도 할 걸 하고 많이들 후회하시더라고요. 울던 보호자분들에게서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거였어요. 엄마, 왜 나를 두고 먼저 가. 여보, 나랑 오랫동안 같이 산다고 했잖아요."


"보호자들이 원통함을 표현하는 말들이, 자신과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울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은 그저 제 부탁이지만 말씀드립니다."


내 말을 귀 담아 들었던 것일까. 그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는 내내 울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임종선언을 듣고 나서야 꾹꾹 눌렀던 눈물을 터뜨렸다. 한없이 작아보이기만 했던 그가 하늘을 향해 목을 젖히고 울며, 자신의 가장 커다란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가 여태껏 어머니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목소리와 눈물에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닫힌 임종방 문 밖에서 수간호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자분이 방금 임종하셔서요. 저희가 말씀드려서 곧 정리하도록 할게요."

송아지 울음 같은 남자의 소리를 듣고 문 앞으로 보호자들이 모여들었나 보다.  임종방에서 나는 소리 하나하나에 환자를 지키는 보호자들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때 생각했다. 임종전문병원을 만든다면 방마다 방음벽을 견고하게 해야겠다고. 환자가 임종하기 직전까지 참아낸 눈물 섞인 목소리를, 보호자들은 뽑아내야 했다. 그들이 그렇게 새 삶을 짓는 동안, 아직은 살아있고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타인의 울음을 듣고 불안을 느끼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누구든 사랑하는 이가 죽는 순간까지 남 눈치를 보는 일은 없길 바랐다.


흰 천으로 감싼 어머니의 뒤를 따라 임종방을 나오던 그의 얼굴이 기억나진 않는다. 병실과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을 소리내어 운 그의 어깨가 조금은 펴진 것 같다 느꼈다. 그날 그의 울음소리는 아마도, 그가 살면서 낸 가장 큰 소리였을 것이다. 일기장 속 나는 그의 어깨를 보며, 그들의 울음소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문 사진: UnsplashSebastian Mar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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