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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min Shin Aug 29. 2023

<오펜하이머>로 그린 인간의 복잡성과 분열

*영화 <오펜하이머>(2023)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펜하이머>를 보기 이전까지 필자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열렬한 팬은 아니었다. 이 영화에 대한 강한 이끌림은 세계적 거장의 신작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홍보성 문구보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이 사진 한 장에서 비롯되었다.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배우 킬리언 머피의 두 눈에서 보이는 (특정할 수 없는 감정을 혼란스러움이라 칭한다면) 혼란한 감정이 사진을 통해 내게로 전가되었고, 영화관에서 그를 만나기에 이르도록 했다.


국내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놀란 감독에게 감독 자신이 오펜하이머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묻는 질문에, 감독은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개발을 결정하기까지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어 간단하게 답을 내릴 수 없다 답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과학자들이 옳았는지 여부를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도 덧붙인다. 그간 여러 영화를 통해 감독이 그려온 수많은 인물들 중 가장 모호한 인물이라는 오펜하이머를 통해서, 감독이 표면적으로 제시한 것은 정치 대 과학의 대립, 나아가 여기에서 촉발되는 과학의 윤리성과 순수성에 대한 논의라 보았다. 여기까지가 영화를 보기 이전에 영화의 의도에 대해 내린 내 일차적 판단이었다. 그러나 감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한다는 영화의 구조적 특징을 고려해볼 때, 과학자로서의 윤리적 갈등상황이 정점으로 치닫는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의 원자폭탄 투하 장면은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지 않는다. 두 장면은 영화의 2/3 정도가 흐른 지점에서 등장하며, 나머지 1/3 정도의 후반부 분량은 1954년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그로부터 5년 후인 1959년 루이스 스토르스의 청문회 장면이 번갈아 보여지며 방대한 분량의 대사가 속도감 있게 관객들에게 쏟아진다. 명확한 주장과 구분을 강요받는 상황의 숨 막힘. 서로 대치하는 상반된 입장들. 이 후반부 장면들에서 나를 압도한 것은 정치와 과학의 서사보다도 온갖 군상들의 다면성, 그리고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오펜하이머의 분열된 상태였다.


영화 초반, 첫사랑 진 테트록과 오펜하이머가 공산주의자 모임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진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오펜하이머에게 과학자로서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는가 묻는다. 이에 오펜하이머는 스스로를 유연성을 가진 사람이라 명명한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 소수의 이론에 깊이 있게 빠져든 학자였다기 보다 여러 이론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학자들과 교류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도 그는 과학자라기보다는 총책임자로서 여러 이해관계 사이에서 모더레이터로서 기능하고 총체적 맥락에서 과업이 무사히 수행될 수 있도록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진행상황을 점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팀을 이끄는 리더에게는 명확한 비전과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모더레이터에게는 균형 잡힌 시선이 필요하다. 유사해 보여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사람들과 사이의 관계를 돌보기 위해서는, 편향된 시각보다는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해할 수 있는 태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상호 대척점에 있는 목소리들도 고루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늘 양가적 상태에서 진정한 자신의 입장과 주장은 무엇인지 찾아야 하는 요구를 받을 때마다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을 터이다. 이런 그의 분열적 상태 속 '나'의 부재는 영화 속 그의 화법에서도 보여진다. 영화 속 오펜하이머의 청문회 장면에서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에 대한 오펜하이머 '본인'의 입장은 어떠했는가를 묻는 검사의 질문에, 오펜하이머는 '우리는'이라는 주어를 사용해 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본인에 대한 청문회에서도 그는 그 자신의 주장보다도 여러 과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검사는 화를 내며 다시 묻는다. 아니, 당신의 생각은 어떠했냐고.


개인의 이름이 영화의 제목으로도 채택된 주인공이기에, 관객은 오펜하이머의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그를 향한 연민이 품기 쉽다. 그러나 영화는 주인공조차도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모호한 인물임을, 끊임없이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제시한다. 특히 오펜하이머와 역사적으로 대척점에 있어왔던 로버트 스트로스가 영화에서도 주로 그 역할을 수행한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호숫가에서 아인슈타인이 오펜하이머의 대화 후 미간에 주름을 잡은 상태로 스트로스를 지나치는 장면이 영화 초반과 말미에 등장한다.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에게 자신을 비난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쳤다는 생각에 빠진다. 이는 역사적 고증이 아닌 감독의 상상력에서 기인한 장면이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행동에 대해 감독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이상 그 원인을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의적 해석을 해보자면 아마도 아인슈타인은 정치에 무관심한 과학자였기에, 정치적 인물인 스트로스에 대한 감정적 분노보다는 '핵분열의 연쇄반응이 이미 시작된 것 같다'는 오펜하이머의 말에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과 파괴적 상황을 촉발한 과학자로서의 윤리적 무게감이 그를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스트로스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근심에 사로잡혔을 뿐인 아인슈타인을 보고, 오펜하이머가 자신을 조롱했을 것이란 피해망상적 사고에 빠진다. 그러나 스트로스가 나쁘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스트로스의 피해망상적 사고는 그 이전에 동위원소 수출의 위험성을 말한 스트로스를 수많은 이들 앞에서 조롱한 오펜하이머의 행위에서 기인한다. 오펜하이머에게 연민을 가지다가도, 그가 가진 지적인 오만함이나 과학자로서 가졌던 여러 정치적 관계와 권력을 향한 욕심은 그를 순수한 과학자로만은 볼 수 없게 한다. 스트로스와 오펜하이머에게 반복적으로 갈마드는 연민은 역시 개인의 다면성을 교차해 보여준다.  


가까운 이에게 나는 종종 분열된 기분을 느낀다 털어놓은 적이 있다. 하나의 대상을 두고 상반된 입장들은 근거리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그 가운데 선 상태로 하고 싶은 말이 잃곤 한다. 그러한 상태로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하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 놓일 때 분열된 상태가 나타난다. 단순화할 수 없는 인과적 관계들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인간 내면의 복잡성, 그리고 복잡성 가운데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촉발되는 한 개인의 분열된 상태(여기서 강요받는 상황이란 폭탄 개발에 대한 찬반뿐 아니라 이념적 선택도 포함한다). 오펜하이머에게서 기시감을 느낀 것은 이런 이유일 터. 한 개인의 분열은 혼란과 그 이후의 공허가 담긴 눈과 날렵하고 예민한 선이라는 그의 외형으로, 그에게 주어졌던 강압적 상황과 주변을 둘러싼 다면적 군상들과의 관계로 그려진다. 인간의 유연성, 복잡성, 그리고 나약함을 이렇게 촘촘하게 보여준 영화가 나왔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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