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나는 종종 머리를 밀고 싶었다. 당시 나는 너무 생각이 많아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학교 앞 작은 자취방에 누워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서'
로 시작되는 '가시나무'라는 노래를 들으며, 머릿속 생각들을 가지치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매일 자라나는 머리카락이라도 밀면, 뭔가 개운하고 정리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의 한 여자 선배가 정토회에서 인도를 다녀오며 삭발을 한 것을 보았기에, 나도 언젠가 머리를 밀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만 싶었다. 그 뒤로 인도와 네팔 배낭여행을 몇 번 가기는 했지만, 머리를 정말 삭발하지는 못하고, 아주 짧게 잘라보긴 했다. 잠시 가벼운 기분이 들었지만, 여러 복잡한 생각과 마음은 멈추지 않았다.
머리가 짧았던 시절20대 중반, 고등학교 동창의 자살 등 여러 일들이 겹쳐서 깊은 우울증을 앓고 나서는, 삶과 죽음의 의미가 너무 궁금했다.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살아야 하는지가 궁금했고, 해가 비치면 사라지는 안개 같은 삶 속에 붙잡을 수 있는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전까지 전력을 다해 좇고자 했던 돈이나 명예, 좋은 직장, 문화생활이나 배움, 만남 등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누구보다 모범생으로 지내며 10년이 넘게 학교에 다녔는데, 나는 갈수록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마치 진리를 찾아 선지식을 만나러 다녔다는 선재동자처럼 행복해 보이는 여러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때로는 히말라야 오지나 프랑스의 시골 마을까지 찾아가서 가슴속에 품고 있던 질문들을 꺼내놓았다. 마더 테레사 하우스나 꽃동네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고,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 죽어가는 이들의 옆을 지키기도 했고, 갠지스강가에 앉아 화장터에서 타들어가는 시체들을 한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진짜 머리를 깎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어떤 욕망이나 걱정,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맑고, 밝게 마음을 닦으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나서, 평소 친분이 있는 비구니 스님께 전화를 드렸다. 스님께서는 가방 하나에 최소한의 짐만 챙겨서 절에 내려오라고 하셨다. 막상 그 말을 들으니, 덜컥 겁이 나면서, 뒷걸음질이 쳐졌다. 머리와 다르게 움직이는 몸의 반응이 낯설었다. 나는 스님께 나의 상태를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내게 물어보셨다.
"세상에 어떤 미련이 남아있나요?"
그 질문을 들었을 때 떠올랐던 것은 엄마도, 아빠도, 친구도 아니었다. 내 안에서는
'엄마가 되어보고 싶다.'
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겪고 보지 않았던 미래의 일이었기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마음 깊이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배경을 찬찬히 살펴보게 되었다. 당시 내가 매일 읽고 있었던 기도문에서는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상의 사랑을
'하나뿐인 아이를 향한 엄마의 사랑'
이라고 비유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 사랑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나의 몸 안에 또 다른 생명을 품는다는 것, 그 생명을 낳고 기른다는 것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온전히 알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애써 챙겼던 짐가방을 다시 내려놓고,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해 보았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살기에는 숨이 막혀왔기에, 나의 부모님처럼 귀농을 해서, <조화로운 삶> 등의 책을 읽으며 동경했던 스캇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처럼 자연에 순응하며 자급자족 하는 사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게 품은 마음의 씨앗 덕분인지 나는 몇 년 뒤 지인들이 살고 있는 지리산 자락에서 몇 달을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관계에서 많이 상처 입고, 지쳐있는 상태여서, 산속에서의 겨울이 유난히, 길고, 춥고, 어둡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내게 마이클 부블레 내한 공연을 가자고 했다. 마이클 부블레가 누군지 잘 몰라서, 그의 노래를 찾아 듣는데, 왠지 남미의 따뜻한 바람과 빛이 내 마음에 흘러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얼어있던 몸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와 콘서트를 보고 나서, 빠르게 가까워졌고, 그는 내게 청혼을 하며 한 가지 약속만 해달라고 했다.
출가를 하지 않고, 나와 살아달라.
는 약속이었다. 그는 늘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좋은 동반자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출가(出家) 대신 출가(出嫁)를 선택했다. 신랑은 서울살이를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산자락에 있는 집에 작은 마당에 데크를 설치하고, 꽃 화분 등을 놓아주었다. 섬세한 관심과 사랑 덕분에 산산조각이 난 듯 아팠던 몸과 마음은 조금씩 회복이 되어갔다.
결혼식 청첩장에 넣기 위해 직접 그린 그림
신랑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가 내게 보여주는 한결같은 사랑의 비결이 궁금해서 그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내가 배우고 익히고자 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가리키는 지표였다면, 성경 안에 적힌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은 현실에서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산속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에서 맑게 살아가며,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변화들을 겪으며 결혼을 한 뒤, 나는 다음 해 봄, 임신을 했다.
당시 살던 집 마당에서, 내가 그린 그림과 꽃을 들고 찍은 만삭 사진 '엄마'가 된다는 것은 정말인지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입덧에 한동안 밥을 먹지 못해도 배는 계속 불러왔다. 그래도 내가 선택한 엄마의 길이라, 나는 그 변화들에도 적응하고자 했다. 가능한 매일 자연 속을 고요히 걸으며, 아이에게 말을 걸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미리 알려주고자 했다.
그래서였을까. 배가 보름달처럼 차올랐던 어느 날 밤 꿈에서는 한 여자 아이가 나와서
나는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그를 실천하기 위해 두 사람을 선택해서 왔어요.
라는 말을 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말이었다. 아이가 세상에 나온 뒤에는 정말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일상들이 몇 년간 이어졌다. 출가를 하면 약 3년간 물 긷고, 청소나 허드렛일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낮추고 닦는 행자 생활을 하는데, 나는 마치 진짜 행자가 된 듯 밤낮없이 주변을 쓸고, 닦으며 아이를 돌봤다. 몇 년 뒤엔 둘째를 낳고 기르게 되어 그 기간은 더 길어졌다.
아이와 함께 곯아떨어진 날, 신랑이 찍어준 사진엄마라는 역할은 내가 기대한 것처럼 환상적이고,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고달프고, 힘에 부쳐 엉엉 울고픈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을 통해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감정들과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두 아이들은 내가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을 깨우쳐주는 스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작고도, 귀여운 두 스승들을 모시고선, 나는 그들의 말을 다시 잊을 새라 받아 적으며 스스로를 비추고, 성장하는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그 여정과 일상을 잘 풀어가 보고자 한다. 내가 선택해서 걷고 있는 이 길에서 얻은 여러 통찰과 배움들이 많은 이들의 가슴에 꽃다발처럼 잘 전해질 수 있길 바라며.
첫 아이의 백일 무렵, 선물받은 꽃들로 사랑을 수 놓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