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도 깊었던 우울증 이후에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감정들을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우울이 찾아왔지만, 나는 그 감정들이 내게 주는 신호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 오래도록 곁에 두고 읽고 있는 루미의 시를 볼 때마다, 나는 내게 찾아오는 감정들을 손님처럼 환영하고 맞이하며, 그 감정의 메시지를 살피게 된다.
여인숙
- 잘랄루딘 루미
인간이란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거나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들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여러 감정 중 특히 우울과 불안의 감정은 내 안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처들과 트라우마들을 보여주며 그를 돌보라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시의 구절처럼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 나는 기도와 명상, 상담 등의 내면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며 모든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렇게 감정들을 피하지 않고 오롯이 받아들일 때마다 마치 출산을 할 때 고통의 정점에서 생명이 태어났듯, 물이 끓어서 수증기가 되듯 내 안에서 어떤 변형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만큼 나는 확장되고,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때론,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 등을 마주하게 될 때는 그 과정이 지난하고 힘들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모든 성장은 나선형'이라는 융의 말을 기억하며, 등산을 하듯 다시 길을 오른다.
최근에는 우울과 연관된 어둠의 시간이라는 것의 의미와 그 역설적인 축복에 대해 사유하다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어둠이 없으면 어떤 것도 탄생하지 않고
빛이 없으면 어떤 것도 꽃 피지 않음을 아는
희망을 품은 영혼의 정원사가 되게 하소서
- 메이 사튼
위의 글귀를 다시금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며 내가 겪었던 크고 작은 우울과 불안, 아픔과 고통들이 씨앗이 되어 자라나 내 안에서 꽃으로 피어나고 있음을 느껴졌다. 문득, 대학생 때 우리말로 철학을 하시는 이기상 교수님께 들었던 강의에서 '아름답다'라는 단어의 어원이 내 안에서 싹을 틔우는 아픔, '앓음-앓음 다움'이라고 풀이하셨던 것이 기억이 났다. '아름드리' 나무에서처럼, '아름'이라는 것이 '두 팔을 한껏 뻗어 닿은 듯 가장 나다운' 것을 의미한다는 또 다른 어원도 찾았다. 삶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내 안에서 어떤 아픔이나 감정이 올라오더라도, 나는 가장 나다운,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엄마는 내가 아플 때마다 내가 아픈 이유가 '더 많은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돌아보니, 내가 어릴 적 천식이 너무 심해서 응급실에도 여러 번 드나들었던 기억으로 백혈병과 난치병 아이들의 마음을 공감하며 가르치기도 했고, 우울증 이후에는 여러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오고 있다. 내가 겪었던 몸과 마음의 아픔이 다른 이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이해하고 공감하는 통로가 되어주었음이, 우리가 씨앗들이 뻗어내는 뿌리처럼 서로를 지지하며 연결되어있음이 나날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요즘 내가 하는 많은 것들은 우울증의 한가운데 있을 때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많다. 그 당시에는 친구들이랑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는 것도 다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때의 나처럼 출구가 없는 어둠에 갇힌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에게, 분명 그 고통에도 끝이 있음을, 새로운 삶이 펼쳐질 수 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선물처럼 주어진 내 삶에서의 남은 생은 나와 주변의 고통을 보듬고, 사랑을 키워가며, 희망을 품는 아름다운 영혼의 정원사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