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
나는 등교 첫날 마음이 들떴다. 힘든 1학년이 지나고, 2학년에 올라 드디어 나도 남녀 합반에 배정되었기 때문이다. 남녀가 같이 있는 새 학급에 들어서자 그동안 어두침침하게 보였던 교실이 눈부시게 빛나 보였다.
학년 첫날 선생님은 학생들이 한 명씩 나와서 자기소개를 하도록 했다. 나도 차례가 되어 이름과 사는 곳을 말하고 우물쭈물하다 자리로 들어왔다. 나는 다른 아이들의 소개를 지켜보았다. 남자애들은 가끔 까불거리며 말을 해 잔잔한 웃음을 유도한 반면, 여학생들은 대부분 간단하게 자기 이름을 말하고 들어갔다.
다음 순서가 된 여학생은 좀 달랐다. 그녀는 하얀 티에 검은색 재킷을 입었는데 긴 갈색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약간 까무잡잡한 얼굴에 길게 찢어진 눈을 깜박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였다. 코는 오뚝하고, 입은 다물고 있어 새침해 보였다.
마침내 그녀가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은 정은수이고, 바이올린을 꽤 오래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할 말을 고르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최근에 바이올린 선생님과 영화관에 가서 아마데우스를 봤는데 너무 감동적이라 추천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처음에 저 애는 뭔가 싶었다. 다들 이름 얘기 후 형식적인 말만 하고 들어가는데, 갑자기 바이올린에, 아마데우스라니. 더군다나 나는 바이올린을 실제로 연주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기에 그녀가 신기해 보였다.
더군다나 아마데우스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제목이 영어고 꽤 어려운 걸 보니 외국의 액션 영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차르트는 알아도 아마데우스가 그 이름의 일부인지는 몰랐다.
얼마 후 토요일이었다. 토요일 밤에는 언제나 밤 11시부터 텔레비전에서 ‘주말의 명화’를 했다. 나는 영화관에 가 본 적도 없고, 비디오 플레이어도 집에 없었다. ‘주말의 명화’는 내가 영화를 보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날 마침 아마데우스를 방송했다.
나는 은수가 한 말이 있었기에 흥분했다. 영화는 어느 정신병원에서 휠체어에 앉은 못생긴 할아버지가 신부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액션을 기대했던 나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그러더니 어린 모차르트가 나왔다.
그런데 모차르트의 목소리가 익숙했다. 바로 내가 매주 보며 좋아하는 ‘맥가이버’의 주인공 배한성 아저씨였기 때문이었다. 모차르트는 ‘하하하하’하고 특이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술을 마시고 여자랑 놀면서도 피아노를 누운 채 현란하게 쳤다.
나는 어느새 영화에 빠져들었다. 배우들이 분장을 한 채 뮤지컬을 연기하는데 모차르트가 오케스트라 앞에서 손을 휘저으며 지휘하는 장면은 너무 멋졌다. 살리에르가 십자가를 향해 신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고, 그걸 모르는 모차르트는 ‘가면맨’의 작곡 의뢰를 받아들인다.
모차르트가 병상에 누워서도 진혼곡을 작곡하는 모습에서는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모차르트의 시체가 비석도 없는 공동묘지에 던져질 때는 나도 같이 바닥에 버려지는 것 같았다. 나는 천재 모차르트가 좋았다.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은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외모도 어른스러운데, 바이올린을 켠다고 하고, 거기에 이런 영화를 보는 은수는 나와 다른 세계 사람인 것 같았다. 점점 그녀를 동경하게 되었다.
은수는 나와 교실에서 떨어져 있고 조용한 성격이라 제대로 말할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자리를 바꾸게 되어 운 좋게 내가 은수의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는 왠지 그 애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졌다. 숨이 막히고, 얼굴이 달아올라 바보 같은 실수만 했다. 은수의 짝인 정희에게는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데 옆에 있는 은수가 쳐다보기라도 하면 그때부터 말을 더듬었다. 내가 벌벌 떨며 바보같이 실수를 연발하니 은수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은수의 웃음만으로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어느덧 공부는 뒷전이고 어떻게 은수에게 말이라도 한 번 더 걸고 웃길 수 있나가 관심사였다. 그러는 사이 성적은 점점 내려가 반에서 5등, 전교에서 75등까지 떨어졌다. 그래도 성적표를 본 엄마의 나가 죽으라는 말이 나에게는 별로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은수 짝 정희와 좀 친해졌어도 은수하고는 결코 친해지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학년을 마치게 되었다. 3학년에는 그녀와 다른 반이 되어 떨어졌기에 더 말을 걸 기회도 없었다. 그렇게 은수는 나에게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