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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피스 May 12. 2020

성장기

나는 사춘기 때 내가 슈퍼맨이라 생각했다. 그런 내게 대학입시는 그게 진짜라는 걸 증명할 기회였다. 94년 입시는 수능을 두 번 봤다. 그중 나은 성적을 선택해 대학에 지원했다. 대학 지원 후 대학별 본고사를 봤다. 결국, 나는 큰 시험을 세 번 봐야 했다.

 

첫 수능은 8월에 있었다. 시험 전날에 잠이 안 왔다. 신경이 곤두서고 배가 아팠다. 엄마가 사둔 우황청심환을 씹어 먹었다. 그래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시험 시간에 옆 사람을 신경 쓰는 건 여전했다. 시험을 어떻게 봤는지 정신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고, 누가 몸을 움직이면 두려움이 엄습했다.


성적은 200점 만점에 165점이었다. 서울대 주요 학과는 최소 170점이 넘어야 했다. 나는 무더운 여름 날씨 때문에 더 신경이 곤두섰다고 생각했다. 날씨가 선선해지는 10월 2차 수능에는 나아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2차 수능도 증상은 그대로였다. 더군다나 문제 난이도 조절 실패로 1차보다 점수가 오른 학생이 드물었다. 나는 1차 수능 점수로 대학을 지원해야 했다.


12월에 대학 원서를 썼다. 학교 강당에 마련된 3학년 각반 담임의 책상에서 원서 접수 전 상담을 했다. 나도 엄마와 함께 강당에 갔다. 담임은 앞에 입시 서류들과 배치표를 쌓아 두고 있었다.


담임은 내가 턱걸이로 내신 1등급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83점을 받아 전교 1등을 한 3반 인규는 서울대 신문학과에, 또 우리 반 현수는 175점으로 경영학과에 지원한다고 했다. 그러니 165점인 나는 서울대 비인기학과나 그 이하에 가라고 했다.


나는 엄마 사주에 나오는 엄청난 아들이었다. 엄마는 사주를 보러 가면 점쟁이가 무릎을 ‘탁’ 치며 “이렇게 아들이 훌륭한데, 뭘 사주를 봐, 당장 가”라고 말한다고 했다. 처녀 때는 길을 가던 스님이 절을 해 이유를 물으니 아들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내가 서울 법대에 지원도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엄마는 담임의 제안을 거절했다. 법대에 지원할 거라고 했다. 수능 점수가 나쁜 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우리 아들은 본고사에서 수능을 뒤집고 합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옆에서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누가 다리를 떨고, 귀에서 소리가 들려도 문제없다. 결국, 현수를 제치고, 인규를 넘어 서울 법대에 들어갈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과 달랐다. 그런 내가 시답지 않은 애들에게 진다는 건 말도 안 됐다. 


담임은 손사래를 쳤다. 아무리 본고사가 있어도 그 수능 점수로는 무리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고대 법대에 가면 고시 공부하는 데 좋다고 덧붙였다.


엄마와 나는 담임에게 조금 양보했다. 정치학과에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좀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나중에 고시 패스하는 게 중요했다. 우리가 한발 물러섰음에도 담임의 반응은 차가웠다. 


어느덧 원서 접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원서 접수 현장에 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마감 10분 전인데, 경쟁률이 법대는 5대 1, 정치학과는 4대 1이라고 했다. 어차피 둘 다 비슷한데 법대는 어떠냐고 했다. 나는 내 증상으로 봤을 때 법대는 조금 무리라고 했다. 엄마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본고사는 1월 초에 이틀간 봤다. 시험을 보고 나오니 건물 앞에 수험생과 학부모들로 가득했다. 엄마는 내 얼굴에 핏기가 없다고 했다. 수험생 중 제일 얼굴이 허옇기에 찾기는 쉽다고 말했다. 


시험 후 면접을 보는데 정치학과 재학생들이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학생, 청바지를 입은 키 큰 여학생들이 수험생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세련된 선배들을 보니 어두침침한 법대보다 나아 보였다. 정치학과가 마음에 들었다. 


합격자 발표날이 되었다. 채점을 해보니 시험을 잘 본 것 같았다. 나는 엄마에게 그냥 법대에 지원할 걸 그랬다고 말했다. 엄마도 “나 서울법대 봤다가 떨어졌다”라고 말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경쟁률만 높을 뿐 별거 아니었다고 아쉬워했다. 


어느덧 발표 시간인 아침 10시가 되었다. 아버지가 집에 있는 수화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ARS 안내에 따라 수험표의 내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셨다. 엄마와 나, 예비 고3인 동생은 아버지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억”


아버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수화기를 놓쳤다. 마치 감전된 사람 같았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보셨다.


“불합격이라는데”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실패했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항상 다 잘된다고 했는데. 나는 엄청난 사주를 타고났는데.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얼마 후 인규는 신문학과에 합격했다고 들었다. 나는 그러려니 했다. 내가 무시했던 현수마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덕분에 나는 졸업식도 가지 못했다. 


나는 슈퍼맨이 아니었다. 그저 사춘기의 헛된 망상이었다. 그렇게 구름 위에 떠 있던 나는 드디어 지상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현실은 쓰라리고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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