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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요일들
by 고수리 Nov 04. 2018

아랫집이랑 나눠 먹으렴

어떤 음식은 손으로 만드는 위로 같아서

엄마가 김치를 보낸다고 전화가 왔다.

 

"깍두기 한 자루랑 배추김치 열 포기 담갔단다. 다섯 포기씩 나눠 보내니까... 절반 나눠서 아랫집 언니 가져다주렴."


당연히 남동생에게 나눠주라는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와서 갸웃했다. 엄마는 말했다.


"언니 만삭이라며. 그맘땐 먹고 싶은 거 꼭 먹어야 한다."


아마도 엄마한테 해준 이야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얼마 전, 출산을 앞둔 아랫집 언니가 놀러 왔다. 평소 내가 잘 따르고 의지하는 언니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김치 얘기가 나왔다.

 

"언니, 먹고 싶은 거 잘 챙겨 먹고 있어요?"

"혹시 시장에서 김치 사 먹어본 적 있어? 괜찮은 반찬집 있을까?"


언니네 집에 김치가 똑 떨어졌다고 했다. 그동안은 양가 어머님이 보내주신 김치로 살았는데, 최근에 어머님들 건강이 나빠지셔서 괜히 힘들게 해 드릴 것 같아 김치 얘기를 꺼낼 수가 없더란다. 그래도 김치가 너무 먹고 싶어서 믿고 먹을 만한 걸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몰라 찾아보고 있다고 했다.


그 마음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임신해 본 사람들은 다 알지 않을까. 그맘땐 사무치게 먹고 싶은 음식이 하나씩 있는 것 같다. 나에게는 그런 음식이 엄마표 시금치 된장국이었다. 밖에서 사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이 많은데도 나는 다른 거 말고 엄마가 만들어준 된장국이 먹고 싶었다.

시금치 된장국은 너무 단순해서 레시피랄 것도 없는 음식이지만 내가 만들면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심한 입덧 때문에 몸도 마음도 몹시 예민했던 시기. 결국은 엄마가 서울에 올라와서 시금치 된장국을 끓여주었다. 입덧 때문에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내가, 그날은 된장국에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정말 살 것 같았다.


아마도 이즈음이 한 철 김장김치가 떨어지는 시기인가 보다. 우리 집도 김치가 동나서 추석 때 엄마한테 신김치 한 통 얻어온 게 전부였다. 엄마는 김치를 담아주면서 그냥 먹기에는 너무 시니까 볶아먹거나 끓여 먹으라고 했다. 언니에게 조금이라도 챙겨주고 싶은데 집에 있는 김치가 그것뿐이라. 혹시 신김치도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김치 아주 좋아해. 그냥 흰 밥에 김치 숭덩숭덩 잘라 넣은 다음에 참기름 두르고 설탕 살짝 뿌려서 비벼 먹으면 최고야. 진짜 맛있어."


언니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돌아가는 길에 김치 두 포기를 쥐여 주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사진이 도착했다. 양푼에 맛깔나게 비벼진 김치 비빔밥. '김치 넣다가 냄새 때문에 바로 비볐다. 고마워 잘 먹을게.' 말하는 언니가 오늘 밥 한 끼는 행복하게 먹었겠구나 싶어 뿌듯했다. 이 이야기를 엄마와 통화할 때 했더랬다. 그날로 엄마는 김치를 담갔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그맘땐 먹고 싶은 거 꼭 먹어야 해."


엄마에게도 그런 음식이 있다고 했다.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땐 입덧이 정말 심했다고. 그때 엄마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 뚝 떨어져 살림집을 차린 새댁이었는데, 임신하고 뭐라도 챙겨 먹기는커녕 주변에 챙겨주는 사람 하나 없어서 날로 야위어갔다고 했다. 하루는 보다 못한 옆집 할머니가 미숫가루 한 사발을 만들어 줬다고. 보리로만 손수 빻아 만든 미숫가루를 설탕 듬뿍 넣고 큰 사발에 하나 타 줬는데, 엄마는 그때 먹은 미숫가루 맛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단다.


"그 한 사발이 전부였어. 지금 같으면 할머니한테 물어서 구해 먹으면 되는데, 그때는 엄마가 낯선 곳에서 소통하는 게 서툴고 어려운 새댁이라서 더 달란 말을 못 했어. 그냥 '고맙습니다'하고 인사하는데 울 뻔했다니까. 그때 그 맛... 정말이지 살 거 같았어.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엄마가 그랬다. 그맘때 정말 먹고 싶었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그 기억이 평생을 간다고. 엄마에겐 그게 보리 미숫가루였고, 나에겐 시금치 된장국이었다. 아랫집 언니에겐 김치였으면 좋겠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이런 음식을 만나본 사람은 알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이 평생 기억에 남은 이유가 단순히 맛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어떤 음식은 손으로 만드는 위로 같다. 재료를 구하고 씻고 다듬고 만들어 전하는 수고로움과 누군가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이 한데 섞인 맛깔스러운 위로. 그런 음식을 입으로 넘겼을 때, 나는 처음으로 미음을 먹어본 아기처럼 정말이지 살 것 같은 커다란 힘을 얻었다. 그저 '고맙습니다' 인사하며 울 것 같은 마음으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세상에는 이런 음식도, 이런 위로도 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새댁한테 김치 갖다 줘. 김치통에 나눠 담을 때, 김칫소가 접힌 부분을 위로 두어야 해. 괜히 휘적거리다가 거꾸로 담아버리면 맛이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요즘 배추가 별로라서 맛은 없다만, 그냥 푹 삭혀서 김장 전까지 맘껏 먹으라고 하렴."


엄마는 따따부따 말이 많다. 언니에게 우리 엄마 잔소리를 그대로 전해주고 싶었다. 나는 이런 우리 엄마가 좋았다. 나도 이런 손 크고 마음 큰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하며. 엄마의 김치, 아랫집이랑 맛있게 나눠 먹었다.






그렇게 같이 김치 나눠 먹던 언니가 오늘 어여쁜 아기를 낳았습니다. 축하해주세요. 모두의 사랑을 듬뿍 전하고 싶네요 :)


@suri.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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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엄마의 요일들
소속 직업출간작가
소소한 것 소외된 것 소중한 것들을 보고 씁니다 daljas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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