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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Jun 28. 2021

우리 모두에게는 고유한 이야기가 있다

솔직하게, 글쓰기 안내자의 일에 관하여

내가 이끈 첫 글쓰기 수업은 막차 시간에 쫓겨서야 끝이 났다. 2018년 7월, ‘마음 쓰는 밤’이라는 모임을 열었다. 신촌의 어느 허름한 건물 8층. 비좁고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찾아온 열두 명의 사람들과 글을 썼다. 금요일 밤이었다. 바깥은 소란한데 어째서 하필 왜, 우리는 초면에 비좁은 테이블에 다닥다닥 붙어선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오들오들 떨면서 자신의 글을 낭독하고, 제 얘기처럼 다른 사람 얘길 들어주다가, 십년지기 친구처럼 진지한 말을 건네주는 걸까. 어쩌자고 잔뜩 긴장한 안 유명한 작가의 횡설수설을 믿어주는 걸까. 쉴 틈도 없이 네 시간이나 훌쩍. 그러나 우리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다섯 시간이고 여섯 시간이고 계속했을 것이다.


첫 수업이 끝나고 밤거리를 마구 달려 막차를 탔다. 머리가 핑핑 돌고 온몸이 저릿하고 가슴이 쿵쿵 울렸다. 지나치게 높은 온도와 밀도의 이야기를 과다 습득한 나는, 완전히 소진되었지만 터질 듯 벅차오르는 이상한 마음을 느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달래 보았지만 잠들지 못하고 결국,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글을 썼다. 무언가 시작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글쓰기 안내자가 되었다. 사람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이끌고 이어주는 사람. 단순히 글쓰기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로 나의 이야기를 찾고 나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고 싶어서 ‘강사’가 아닌 ‘안내자’라고 스스로 이름 붙였다. 열 살 어린이부터 칠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성별 연령 직업 모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글쓰기를 안내했다. 어떤 이는 꾸준히 써서 책을 내고 작가가 되었다. 어떤 이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찾고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또 어떤 이는 사무친 이야기를 훌훌 털어내고 홀가분하게 살아갔다. 분명 글쓰기에는 힘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날은 글쓰기 공동체라는 우주를 만난 날이었다. 이야기를 쓴 적은 많았지만, 이야기를 나눈 적은 처음이었다. 그날, 그 밤, 그 공간과 그 공기, 그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기억한다. 에너지를 모은 하나의 점이 아주 높은 온도와 밀도에서 대폭발을 일으켜 팽창하는 우주가 된 것처럼, 그날 신촌 어느 허름한 건물 8층에서는 몹시도 뜨거운 인간들과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모여 팡하고 터져 버린 건 아닐까.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경험과 감정의 파동이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고 오고 간다. 사람이라는 물질과 삶이라는 에너지가 이루는 조화, 그 우주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여태껏 글쓰기 안내자를 하고 있다.



5기까지 이끌었던 소셜살롱 문토 <마음 쓰는 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


더더 되감아본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2010년 다큐 미니시리즈 <인간극장>에서 취재작가로 작가 일을 시작했다. 전문적인 글쓰기를 배운 적 없었던 나에겐 그곳이 글쓰기 학교였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을 집요하게 배웠다. 20년 차 선배 작가, 피디와 짝을 이루어 2시간 30분 분량의 5부작 다큐 미니시리즈를 만들었다. 나는 매일 일간지와 각종 매체에서 사람 이야기를 찾고, 전문 방송인이 아닌 일반인들을 심층 취재하고 관리했다. 프로그램 제작에 들어가면, 20여 일 동안 촬영한 6000분 분량의 영상을 대본처럼 글로 옮기는 프리뷰 작업을 했다. 백과사전처럼 두툼한 프리뷰지가 완성되면, 거기에서 신들을 골라내 5부작으로 구성하고 편집하는 작업, 보도 자료를 작성해 발송하는 작업, 완성된 영상에서 출연자들의 입말을 살려 받아 적고 자막을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시기에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피고 응대하는 일을 했다. 이야기를 여러 형태로 고민하고 구성하고 재가공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는 세 달 가량이 소요되었다.


가장 막중하고 어려운 일은 일반인을 취재하는 일이었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사적인 이야기를 묻는 일이 얼마나 곤란한지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뚝뚝하고 방어적인 반응에 미리 전화 대본을 써두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일상과 안부를 묻고,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이어 나누고, 오늘도 잘 지냈으면 한다는 인사를 건넸다. 나는 당신에게 애정이 깊다. 당신을 늘 궁금해한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런 다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오래 연락을 이어갔다. 모르는 분야의 종사자라면 그 분야를 공부하면서, 부담스럽지 않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심과 애정을 건네며 말을 걸었다. 사람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마음을 활짝 여는 순간에는 수화기를 든 손이 저릿해져 여러 번 바꿔 들어야 할 정도로 긴 통화가 이어졌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쏟아내듯 말했다. 그럴 때는 최선을 다해 들어주어야 했다. 과하지 않게 호응하며 내가 잘 듣고 있다는 표현을 해주어야 했다. 단순한 공감에 그치지 않고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려면, 계속해서 좋은 질문을 던져서 대화를 이끌어 주어야 했다. 그러다 보면 틀림없이 결정적 이야기를 만났다. 취재를 하면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이야기를 발견하고 확장시키는 방법을 체득했다.


키친 테이블 라이터였던 나의 글쓰기가 달라진 것도 이 시기를 겪으면서다. 나에게로 골몰했던 글쓰기가 바깥을 향하게 되었다. 쓰는 일뿐만 아니라 잘 듣는 귀, 잘 묻는 입, 잘 보는 눈, 잘 담는 마음을 배우게 되자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내게도 말을 걸었다. 너는 어때? 너는 어떻게 살았어? 너도 한 번쯤 하고 싶은 이야기 있지 않았어?


나에게도 오랫동안 혼자 써온 내 이야기가 있었다. 2015년 여름,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첫 글을 올렸다. 혼자서만 쓰고 읽던 사적인 글을, 공적인 글로 처음 발행한 것이다. 노트에 숨겨두었던 글들을 초고삼아 30일 동안 매일 글을 발행했다. 조회수가 3000, 4000, 5000 계속 올라갔다. 댓글이 달리고, 독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나둘 출간 제안이 왔다. 그제야 나는 내가 만든 방송에 출연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나 두렵고 부끄러웠다. 그런 한 편으로 홀가분했다. 뭐랄까, 내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허들을 가까스로 넘어서고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기분. 그런데도 다시 일어나 툭툭 털고 걸어갈 수 있는 마음의 힘 같은 것이 생겼다. 나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쓴 글들을 모아 이듬해 첫 책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를 출간했다. 책은 에세이로 분류되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에세이를 썼던 거였구나. 나는 오랫동안 에세이를 만들었던 거구나. 나에게 에세이는 한 사람의 사는 이야기였다.


브런치에 연재를 시작하며 만든 첫 책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로


글쓰기의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책을 내고 작가가 되고 싶은 작가 지망생이 있는가 하면, 설명할 수 없는 절실함으로 뭐라도 쓰는 키친 테이블 라이터가 있다. 커다란 상처를 겪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쓰는 사람이 있고, 혼란과 방황 속에서 자신을 찾기 위해 쓰는 사람이 있다. 글쓰기에 단순한 호기심을 품고 쓰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작가가 되기 위해서만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글을 써야 할까. 내가 작가로서 써온 글이 그렇듯이, 나는 책을 위한 글보다 삶을 위한 글을 우선으로 써야 한다고 믿었다. 수업 첫 시간에는 글쓰기를 앞두고 먼저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고 이야기했다. 반드시 ‘나’라는 주어를 붙여서. 나의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나답게 쓸까? 이 질문을 곰곰 생각해본다면 세상에 똑같은 글을 쓰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에세이 작가로 활동하면서 글쓰기를 가르치게 되었다. 도서관과 지자체에서 소소한 강연을 하다가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소규모 글쓰기 수업을 이끌게 되었다. 앞서 나의 작가 여정을 길게 이야기한 것은, 내가 이끄는 글쓰기 수업이 이 과정들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취재하듯 학인들을 만났다. ‘나의 이야기, 나의 문체를 찾는 글쓰기’라는 모토를 두고 한 사람의 이야기를 찾는 과정에 집중했다. 수업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묻고 발견하고 이끌어내면서 바랐던 건 오직 하나였다. 단 한 번이라도 나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발표해보는 것. 부끄럽고 창피하고 아프거나 힘들더라도, 내가 쓴 글을 내 목소리로 낭독하고 다른 사람들의 응답을 들어보는 기회를 겪어보는 것이다.


모두가 작가이자 독자가 되는 경험이 필요했다. 삶을 위한 글쓰기는 창작인 동시에 대화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고 전달하고 나누는 과정. 그것은 단순히 ‘쓰기’에만 해당하는 영역이 아니고, 보기 듣기 쓰기 말하기 사유하기 감응하기 등 여러 요소들이 긴밀하게 오갈 때에서야 확장된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라고 리베카 솔닛은 말했다. 나는 글쓰기 수업이야말로 그런 말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대화의 기회이길 바랐다.


소셜살롱 문토에서 <마음 쓰는 밤>이라는 모임을 시작한 후로, 창비학당 <고유한 에세이>, 취향관 <책과 펜과 밤과 마음>, 개인적으로 이끈 <고유글방>까지. 평균 3시간의 러닝타임, 4회차∼6회차, 두 달이 넘는 긴 호흡의 소규모 글쓰기 수업을 오래 이끌었다. 최소 3편 이상의 글을 쓰고 나눠봐야 사람들은 마음을 열었다. 진솔한 이야기가 터져 나오고 속 깊은 대화와 감정이 오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글쓰기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무대에 서는 사람 같다. 손바닥에 밴 땀을 슥 닦고 긴장한 손끝을 꾹꾹 주무르며 기도한다. 제발 실수하지 않게 해 주세요. 한 사람의 눈을 마주 보며 그가 써 내려간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그의 삶에 상처가 남지 않도록 사려 깊으면서도 섬세한 조언을 건네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일은 언제나 어김없이 조심스럽다.


글쓰기 수업을 하는 동안, 나는 따돌림을 당했던 초등학생이었다가, 엄마를 미워하는 고교생이었다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다가, 아픈 몸을 고백하는 사람이었다가, 가족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었다가, 성정체성을 깨닫고 받아들인 사람이었다가, 우울증을 앓는 청춘이었다가, 폭력의 기억을 고백하는 생존자였다가, 자신의 장애를 기록하는 활동가였다가, 자식을 먼저 보내고 손주들을 키우는 할머니가 되었다.


그들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잘 이해해보려고 노력한다. 이런 노력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업에 모인 구성원 모두가 함부로 판단하거나 외면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 사람이 되어본다. 타인의 삶을 잘 듣고 잘 생각하고 잘 말해주려고 노력하면서 헤아려본다. 그렇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 시간 그 공간에는 저마다의 강력한 삶의 이야기들이 터질 듯 모여서 꽉꽉 뭉쳐지고 다져진다. 엄청나게 뜨겁고 농밀하고 귀하다. 한 번이라도 타인과 이런 대화를 나눠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최근 두 명의 학인을 다시 만났다. 희귀병을 앓던 H는 이식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었다. 그는 2년 전 수업에서 말하지 못했던 투병기를 처음 썼다. 수업이 끝나고도 그때 만난 학인들과 글쓰기 모임을 결성해 꾸준히 글을 썼다. 오랜 시간 경험했던 고통과 외로움, 그럼에도 씩씩했던 삶의 의지와 용기를 담은 글을 모아 책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 “작가님, 산다는 건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었네요.” 고통의 경험이 가득했던 그의 글은 이제 세상을 향한 초조하고 조급한 사랑을 담고 있었다.


또 다른 학인 A는 1년 전 수업에서 우울증을 고백했었다.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그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금발머리에 화려한 패턴 원피스를 입고서 방긋 웃으며 나를 찾아왔다. 그 역시 수업에서 만난 학인들과 글쓰기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내 이야기를 내가 들어주는 법을 알았어요. 작가님, 저 이제 사는 게 궁금해졌어요.”


분명해진다. 우리 모두에게는 고유한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잘 쓰고 잘 나누고 잘 헤아려본 사람들은, 잘 살아보고 싶어진다. 반짝이는 두 사람에게 나는 아낌없이 말해줄 수밖에. “아름다워요.”



<마음 쓰는 밤> <고유글방> <고유한 에세이> <책과 펜과 밤과 마음>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학인들



<기획회의>에 글쓰기 안내자의 일에 관해 기고한 글입니다. 마치 '글쓰기공동체빅뱅이론설'이랄까요, 어마어마한 탄생설화처럼 그려진 첫 글쓰기 수업의 기억으로부터 글을 시작했습니다. 멤버들 모두 그날을 기억할 거예요. 그 기억이 여전히 우리를 잘 살아가게 할 것이고요. 아니, 어쩌면 저와 함께 글쓰기 수업을 나눈 학인들 모두, 우리들의 기억을 간직하며 잘 살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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