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을 지나자 거짓말처럼 날이 따뜻해졌다. 한낮, 동료와 국밥을 먹고 거리를 걸었다. 속도 따뜻했는데 볕도 참 따뜻했다. “해를 등지고 걷는 게 좋아요. 등이 따뜻해서 햇볕이 안아주는 것 같거든요.” 그의 말에 고갤 끄덕이며 햇볕에 몸을 내맡겼다. 크게 숨을 쉬어보았다. 평온한 날, 누군가와 마스크를 벗고 볕을 쬐며 나란히 걸어보는 산책이 아주 오랜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새삼 이 산책이 감사했다. “지금을 만끽해요.” 동료가 말했다.
“한동안 저는 ‘만끽(滿喫)’이란 단어를 품고 살았어요. 힘든 날들이 길었잖아요. 서로가 서로를 위해 거리를 둬야 했고 원하는 것들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죠. 오히려 그런 때 ‘만끽’이란 단어를 생각했어요. 지금을 만끽하자.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자. 하루에 어느 순간만큼은 마음껏 누리자고요. 만끽하는 일은 매일의 작은 성취이자 작은 기쁨이었어요. 그래서일까요. 여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소소하게 만끽했던 순간들이 소중하게 남아 있어요.”
만끽하자. 낯선 단어를 소리 내 말해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차올랐다. “수리 씨에게도 그런 단어가 있나요?” 마침 바람이 불었다. 흔들리는 가로수 이파리 사이로 조그마한 볕들이 일렁거렸다. 나에겐 이 단어였다.
“볕뉘. 제가 좋아하는 햇볕의 이름을 알게 됐어요. 어떤 시에서 ‘겨울이면 볕뉘를 찾아 두리번거리지’라는 문장을 읽고 ‘볕뉘’를 사전으로 찾아봤어요.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이나 ‘그늘진 곳에 미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보살핌이나 보호’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더군요. 겨우내 자주 볕뉘를 찾아 걸었어요. 한겨울엔 나무들도 앙상해서 볕뉘를 만나기 힘들어요. 그렇지만 어딘가에는 조그마하게 햇볕이 비치는 때가 있더라고요. 골목과 골목 사이, 조금 열린 창문 틈, 깨진 담벼락 같은 곳들. 그늘진 자리마다 잠시나마 비치는 조그마한 볕들이 좋았어요. 그 자리들을 오래 지켜보다 보니 봄이구나 깨닫는 때가 있었어요. 봄이 되면 볕뉘가 머물던 틈마다 작은 풀이 돋아나요. 돌 틈에서 민들레가 피기도 하고요. 어쩐지 감동적이죠.”
“볕뉘와 만끽, 단어들이 우릴 안아주는 것 같네요.” 우린 웃었다. 작은 틈 사이로 손바닥을 내밀고 볕뉘를 쬐어 보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 자리엔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볕은 머문다. 볕은 따뜻하다. 제자리에 머물며 서로에게 볕뉘 같은 보살핌을 나누던 우리의 나날도 분명 따뜻했으리라. 이제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마음으로 밖으로 나가 함께 봄볕을 만끽해도 좋을 것이다. (23.03.10)
3월 10일 자 동아일보 [관계의 재발견] 칼럼, 마음에 품었던 단어에 대해 썼습니다. 당신은 어떤 단어를 품고 살았나요? 제가 '볕뉘'를 발견했던 시집은 조온윤 <햇볕 쬐기>였어요. 오늘은 햇볕 쬐며 걷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래요. 볕뉘의 기억을 품고 누군가와 나란히 봄볕을 만끽해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