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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귀퉁이를 접으며

by 고수리

‘지나치게 바쁘다는 건 마음을 잃는 거구나.’


읽던 책의 귀퉁이를 접었다. 우연히 만난 문장에 마음이 일렁여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놀러 가자고. 바쁜 나날에 잠시 쉬어갈 귀퉁이를 접고 싶었다. 멀리 떠나지 않더라도 하루쯤은 내 일상의 반경을 여행자처럼 걸어보고 싶었다. 평범하지만 조금 낯설게, 소소하지만 조금 특별하게.


사라다빵을 만들어 가야지.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줬던 사라다빵이 떠올랐다. ‘사라다’는 샐러드의 일본식 표기지만 얄궂게도 ‘샐러드빵’이라 고쳐 부르면 맛없게 느껴졌다. 으깬 감자에 야채랑 마요네즈 듬뿍 넣고선 조물조물 버무린 추억의 빵은, 굳이 ‘사라다빵’이라 불러야만 그때 그 맛이 아련하게 느껴진달까.


불을 올렸다. 감자를 찌고 달걀을 삶았다. 오이는 동강동강 얇게 잘라 소금에 절여두고, 당근이랑 양배추를 쫑쫑 채 썰어두었다. 찐 감자와 삶은 달걀은 한소끔 식힌 후에 포크로 폭폭 찍어 으깼다. 커다란 볼에 물기를 짠 오이 당근 양배추를 한데 넣고선, 설탕 소금 후추 툴툴툴 뿌려 간하고, 마요네즈 듬뿍 휘돌려 짜 넣었다. 모두 사이좋게 섞이도록 조물조물 버무리자. 동그란 모닝빵 반으로 갈라 샐러드를 채워 넣었다. 동글동글 빵빵하게. 마침내 추억의 사라다빵 완성! 뒤를 돌아보자 주방이 난장판이었다. 이게 뭐라고. 주먹만 한 빵 하나 만드는데 이리도 품이 들까. 그래도 뿌듯했다. 인생에 아주 중요한 일을 해낸 기분이 들었다.


공원에서 친구를 만나 벚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사라다빵에 과일을 담아온 단출한 도시락을 꺼내고 친구가 사온 커피를 곁들였다. “사라다빵, 내가 만든 거야.” 당연히 사왔을 거라 여겼는지 친구는 감격한 듯 "뭐야."하곤 샐쭉거렸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이거 내 마음.”


정말 그랬다. 화창한 봄날에 도시락을 싸는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누군가와 먹고 싶은 메뉴를 고민하고, 레시피를 알아보고, 재료를 장 봐오고, 하나하나 손질하고, 찌고 삶고 절이고 썰고 버무려 도시락통에 가지런히 챙겨 넣는 마음. 그리하여 좋은 날 좋은 곳에서 사이좋게 나눠 먹고 싶은 마음으로. 수고스럽고 서툴더라도 정성을 다하며 살고 싶었다. 지나치게 바쁜 날들에 떠밀려 중요한 내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사라다빵을 오물거리며 친구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눴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햇살이 너무 따스해서, 배부르고 졸려서 그대로 잔디 위에 누워버렸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꺼내 접어둔 페이지를 친구에게 읽어주었다.


“오늘 살아 있어 기쁘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추우면 맑은 공기를 음미하고, 잠이 부족하면 즐겁게 잠을 기대하고, 그때그때 행복한 일을 찬찬히 헤아리자. 만약 내일이 마지막 하루라 하더라도 오늘과 똑같이 지내리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나날을 살아가자.” - 요시모토 바나나 <여행 아닌 여행기> 41p


꽃그늘 아래 우리는 풀처럼 누워있었다. 햇볕을 쬐며 한동안 잠잠히. 바람이 불자 벚꽃이 봄눈처럼 날렸다. 꽃잎 하나 붙잡아 책 사이에 갈피처럼 끼워두자 선명해졌다. 오늘 살아 있어 기뻤다. 흘러가는 계절의 귀퉁이를 접고서 충분히 만끽해 본 하루. 봄은 꽃갈피로, 사라다빵으로, 햇볕 냄새로 기억될 것이다.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다. 나는 가만히 행복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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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 뉴스레터]에 에세이 ’봄의 귀퉁이를 접으며‘를 기고했습니다. 추억의 사라다빵처럼, 냠냠 오물거리다가 나른해진 마음에 쉼과 힘이 되는 글이었으면 좋겠어요. 글에 등장한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 <여행 아닌 여행기>의 접어둔 페이지도 나눌게요. 오늘, 살아 있어 기쁘기를. 내 마음의 귀퉁이를 접어요.


[오뚜기 뉴스레터] 에세이 전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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