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 왕복 3시간에 내린 '엄마의' 결단
"왜 이직하시나요?"
경력직 인터뷰의 단골 질문, 경험 있으신 분들은 모두 받아보셨지요?
저는 처음부터 확고했어요.
"회사가 멀어서요. 출퇴근에 3시간 정도 걸리는데, 그보다는 가까웠으면 합니다."
우습지만 그랬습니다. 정말 그 이유 하나뿐이었어요.
'엄마가 된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네요. 그때, 제가 커리어를 선택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요.
첫 아이 도토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도 처음 엄마가 되었습니다. 아이는 어떻게 자라는지 하나도 몰랐어요. 지금도 별로 다르지는 않지만, 그 당시에는 업무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던 시기였어요. 임산부라 야근식대도 눈치 보며 긁는데 퇴근은 밤 11시를 넘기기 일쑤였고, 집에 돌아가면 그저 뻗어서 자기 바쁜 나날이었어요. 그런 와중이니 뱃속의 아이가 잘 자라기만을 바랐지 그 애가 자라 나왔을 때 우리 둘이 '어떻게' 키울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못해봤던 것 같아요. 친정은 분당이고 우리는 서울에 사는데도, 친정엄마가 "너는 안달복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하신 말씀만 붙들고 있었네요.
출산휴가로 결재받은 날이 채 다가오기도 전에 이미 도토리는 "나가겠다!"는 신호를 명확히 주었어요. 그러지 않아도 정신이 없었는데 출산예정일까지 빨라지니 마음도 다이내믹해졌습니다. 나오겠다는 애를 막을 수는 없어 일단 낳고, 조리원으로 속행하여 이제 생각을 좀 해보나 하던 찰나- 도토리가 황달로 NICU에 입원을 하게 되어 눈물 콧물 다 빼며 얼결에 졸업(?)하는 일련의 과정이- 튀어 오르는 물을 꺅꺅 피하며 이리 퉁 저리 퉁 부딪히다 정신 좀 차릴만하면 보트가 달달달 기계에 딸려 올라가는 놀이기구를 탑승한 느낌이더군요.
달달달 기계에 딸려 올라가는 듯 주변을 좀 돌아보니, 저는 벌써 아이와 단둘이 집에 남겨져 있었습니다. 출산휴가 3개월에 육아휴직으로 3개월을 더 받았으니 남은 시간은 다섯 달 남짓. 그 안에 무엇이 되었든 결정을 해야 했어요. 여태 엄마 옆에 붙어 민폐 끼치는 모습을 보면 그때 저의 선택을 눈치채셨겠지만(;;) 과감히 이사를 결정합니다. 서울에서만 살다 보니 거리 감각이 둔하기도 했어요. 서울 안에서도 좀 이동할라치면 1시간씩 걸리는 것이 맞잖아요? 아니 일단 그때는 앞뒤 잴 것도 없이 엄마가 아이를 봐주신다고 하니 엄마 옆으로 무조건 옮기겠다 선언했지요.
아이는 이제 겨우 기어 다니는데 복직하기로 한 날은 코앞. 복직원을 내러 처음으로 빨간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다 깜짝 놀라고 맙니다. 승용차로 다니던 그 길이 아닌 것을 그때야 안 것이죠. 빨간 버스는 제가 가야 하는 서울역으로 바로 가주지 않았습니다. 명동을 지나, 종로를 지나, 광화문을 돌아 비로소 그 근처까지 가는 루트였어요. 곧 현타가 왔습니다. 어떡하지? 그러고 보면 그때쯤 운전을 해야겠다 마음먹을 만도 한데, 대중교통만 생각했다니 역시 어렸네요. 다니던 회사는 물론 유럽계 제약사였지만, 국내에 진입한 지 오래되어 유럽스러운 자유로움은 전혀 없었어요. 재택근무도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에 유연근무제가 막 도입되던 시점이었는데. 쓰고 보니 예스럽네요. 아침에 아이 얼굴 좀 보고 가려 욕심을 부렸다가는 마지막 출근시간인 10시도 턱걸이로 맞춰 가기 일쑤였습니다. 아침 9시에 회의라도 잡히면 버스 문간에 매달려 타든, 1시간 반 거리를 지하철로 돌아가든, 평소보다 훨씬 더 지옥스러웠고요. 유럽 회사라 시차 때문에 저녁부터 회의도 많구먼 아침엔 무슨 회의를 또 그렇게 많이 했는지 모르겠어요.
엄마로 맞이한 첫(?) 사회생활은 그야말로 '진. 퇴. 양. 난'이었습니다. 정시에 퇴근하면 길이 막혀 7시에 퇴근해도 8시 반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설 수 있었어요. 야근을 하면 또 야근을 하는 대로 늦어졌지요. 경기도는 버스 운행이 더 일찍 끝난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네요.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경기도 버스는 운행을 안 하는 시간이라 터덜터덜 걸어 집까지 가곤 했으니까요. 첫 아이라 다 내려놓지 못한 욕심으로 이것저것 갈고 찌고 이유식을 만들어 두면 벌써 새벽 두 시. 잠을 자려 누워도 달음질치던 하루가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 눈이 말똥말똥했습니다. 제가 강력히 엄마 옆으로 가겠다 주장했기에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마음에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최고 애착 할머니와 떨어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엄마가 온다는 것은 곧 할머니가 간다는 뜻이니, 무작정 저를 밀어냈어요. 말문이 트이고 나선 더 심해졌지요. 퇴근해서 문을 열면 "엄마는 회사로 다시 가"라는 말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날도 많았거든요. 더 서글펐던 것은, 그런 말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달래어 같이 놀고 씻고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마저도 못하고 아이가 잠든 후 불 다 꺼진 집에 살그머니 들어서야 하는 날이 많았다는 것이에요. 상대적으로 출퇴근 거리가 짧았던 아빠가 돌아와 아이를 재울 때, '섬집아기'를 이렇게 불렀어요. 지금 보면 우습지만 그때는 노래만 들어도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었지요.
엄마가 서울역에 일하러 가면 도토리는 할머니랑 재미있게 놀다가
아빠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도토리는 아빠랑 자고 있는데, 엄마는 도토리가 보고 싶어서
못다 끈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엄마는 M버스를 타고 옵니다.
얼마 전엔가 방송됐던 '산후조리원'이라는 드라마에서 워킹맘 역할로 나오셨던 분이 섬집아기가 워킹맘 노래라며 울던 그것이 실화랍니다. (...) 그래도 신약 허가라며 버티던 저는 독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모성애가 부족해서 그랬을까요.
여하튼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며 무엇이라도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프로젝트만 끝나면.. 일도 할 만큼 했으니 그만하면 멈출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해보자며 다른 곳을 찾아볼 것인지를요. 상대적으로 이직이 많고 자유로운 편이었던 제약업계인데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더군요. 이직이라는 건 단순히 근무지를 옮긴다는 것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다시 저의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니까요. 사실 이미 꽤 오래 다닌 회사를 옮기며- 마음속으로는 커리어가 다소 헝클어질지도 모른다는 각오까지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엄마로서도 저 자신으로서도 가장 좋은 것이라 믿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알지만, 그럼에도 허탈하면서도 웃음이 나고 또 아쉬우면서도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여러 가지 감정이 오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