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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 Oct 29. 2020

사건번호 14-44699

살면서 법원을 들먹인 적이 몇 번 있었다. 한바탕 부부 싸움을 하고 난 후에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법원 앞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 전부였지만, 지금 그곳에 발을 딛고 섰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된다.


늦지 않게 서둘러 왔는데 벌써 자리가 꽉 찼다. 서류를 분류하는 집행관과 사무관들의 엄숙한 표정에 기가 눌려 조심스레 문을 들어섰다. 나는 낯선 곳에 온 이방인처럼 어정쩡하게 서서 분위기를 살폈다. 사람들의 연령대나 성별, 차림새가 다양하다. 빼곡히 놓인 의자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거나, 이리저리 오가며 의견을 교환하는 눈치다.


누가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처음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안내를 해주기로 한 이를 기다렸다. 잠시 후 활기 넘쳐 보이는 내 또래의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짧게 인사를 나누고 서류뭉치를 건네며 오늘 치러질 사건 중 우리는 서른세 번째라고 알려주었다.

 

경매는 열두 시에 시작이다. 앞으로 남은 한 시간 동안 결정을 하고 접수를 하면 된단다. 우리는 식당에 앉아 찍어놓은 물건을 놓고 얻어온 정보를 참고로 서류를 작성했다. 마지막까지 눈치작전을 펴다 처음 정했던 금액을 쓰기로 했다. 한 끗 차이로 당락이 결정될 수 있고 글자나 서류 하나만 빠져도 무효처리가 된다기에 꼼꼼히 몇 번을 확인했다. 숫자에 무디고 머리 쓰기를 싫어하는 나는 경매가 시작되기도 전에 지쳐갔다. 기다리는 동안 탁자위에 놓고 간 대출안내 명함이 수북이 쌓였다.


이십여 년 동안 이곳을 드나들었다는 그녀는 적은 자본으로 쏠쏠하게 재미를 볼 수 있다며 경매를 배워보라 권유했다. 그리고는 서류에 적힌 것들을 열심히 설명해주는데 나는 엉뚱한 것에만 관심이 갔다. 건물주는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왜 물건번호라 하지 않고 사건번호라 하는가 따위가 더 궁금했다. 하기야 경매에 붙여졌다는 것 자체가 사건이긴 하다.


오늘 나는 대리인으로 이곳에 왔다. 평소 고정된 수입에 맞춰 분수껏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길이라며 재테크에 관심을 둔 적이 없다. 누군가 부동산으로 큰 수익을 남겼다는 얘길 들으면 너무 안일하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칠 뿐이었다. 그 사람이 얻은 만큼 어느 한쪽에선 손해 보는 사람이 있을 테고, 무엇보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는 생각이 컸다. 남편 역시도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고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그가 얼마 전부터 부동산에 부쩍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가장으로서 져야 할 책임이 조바심을 내게 한 것일까. 늦둥이 딸을 위해서도 그렇고 활동할 수 있을 때 미리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법원에 대신 가 달라는 남편의 부탁을 선뜻 거절하지 못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주고도 싶었고, 경험하지 못한 곳에 호기심도 일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으니 핑계 김에 나선 것이다.


 조용한 가운데 경매가 시작되었다. 집행관의 빠른 진행에 비해 마무리하는 과정은 더뎠다. 사건이 끝날 때마다 서류를 돌려받기 위해 줄을 섰다. 입찰자가 달랑 한 사람일 때도 있고 몇십 명 경우도 있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구경을 하느라 차례 놓칠 뻔했다.


  “다음은 ‘사건번호 14-44699 상가’입니다. 총입찰자는 6명입니다”라는 집행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건에 연루된 이름과 금액을 한 명 한 명 부르는데 다섯 번째로 불린 내가 가장 높다. ‘혹시 내가?’ 순간, 육 층짜리 건물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큰돈을 만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데… 평소에 소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한껏 꿈에 부풀었다.


 희비가 엇갈린 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낙찰은 원주인이 대동한 대리인에게 돌아갔다. 안내인은 적정선을 넘는 것은 금물이라며 빨리 잊는 것이 상책이라고 위로했다. 애당초 욕심 없이 왔으니 주인에게 돌아간 것이 다행한 일이다.


 줄을 서서 서류를 돌려받고 나니 점심때가 훌쩍 지났다. 긴장을 했던 탓에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밥을 먹으러 줄지어 서있는 상가를 지나는데 앞서가던 그녀가 한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그 물건이란다. 흑백사진으로 본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외부를 예쁜 석재로 장식해 놓아 여느 것과 구별되었다. 나는 눈길을 떼지 못하고 괜스레 안을 기웃거리며 서성댔다.

 ‘저런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쓸 걸…….’

 눈앞에 그림의 떡을 두고 허기가 와락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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