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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 Aug 23. 2023

어쩌다 부천


                                                 

그 남자의 집     

남자의 집은 이층 양옥이었다. 골목을 따라 쌍둥이 같은 집들이 양쪽으로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열린 대문 옆에 풍성한 잎을 달고 있는 고염나무가 보였다. 남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한쪽에 피어있는 함박꽃처럼 마음은 온통 연분홍으로 물들었다. 그해 겨울 그 집 이층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소사’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열다섯 국어시간이었다. 문법수업에 지루해진 아이들이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며 선생님을 졸랐다. 선생님은 운동장 너머 살곶이 다리를 바라보며 기차를 타고 복숭아밭에 갔던 추억을 더듬었다. 소사는 기차를 타고 가야 할 만큼 먼 곳인가 보았다. 복숭아와 연인과 기차.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 이름이 복숭아 즙처럼 입안에 스며들었다. 


남자가 사는 곳이 바로 소사였다. 그사이 지명이 부천으로 바뀌고 기차 대신 전철이 다녔다. 나는 버스를 타고 남자를 찾아갔다. 버스가 시내를 지나 김포공항을 끼고 돌자 서울과 부천의 경계인 오쇠동 삼거리가 나왔다. 이정표에 왼쪽은 고강동, 오른쪽은 오정동이라 쓰여 있는데 도로 옆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허름한 집이 몇 채 보였다. 한껏 치장을 한 공항과는 대조적인 뒷모습을 지나쳐 오른쪽으로 내달렸다. 건물은 보이지 않고 퍼즐 조각을 맞춰 놓은 듯 이어진 논이 펼쳐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촌락이 나올 것만 같다. 길을 잘 못 들었을까. 내 불안은 아랑곳없이 물 담긴 논 속으로 풍경이 밀려갔다.


버스는 한참을 달리다 들판이 끝나는 지점에서 멈췄다. 정류장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종로와 광화문을 함께 쏘다니던 그가 초행길 동네처럼 낯설었다. 앞서 걷던 남자가 손짓을 하며 오른쪽은 안동네, 왼쪽은 새 동네라 일러주었다. 그가 사는 곳은 신축건물이 많은 새 동네였다. 골목을 따라 걸으니 철조망이 둘러진 막다른 길이 나왔다. 그 너머는 미군부대라 했다. 어쩌다 이 먼 곳까지 왔을까.  


80년대 초, 남자의 어머니는 대대손손 살아오던 터를 정리했다. 서울에 있는 아들 곁으로 오기 위해서였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와 오정동 단독주택은 비슷한 가격대였다. 아파트는 다달이 내야 하는 관리비가 부담인데다 묵은 살림을 놓을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단독이라면 자식들이 모여 살 수도 있고 고향 떠난 허전함을 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개발붐을 타고 땅값이 뛰리라는 기대도 한몫했다. 팔고 온 농토 옆으로 일죽 톨게이트가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문전옥답과 맞바꾼 새 터는 몇 해가 지나도 헛기침만 해댔다. 어차피 부대 옆 집값이 오르기란 애저녁에 그른 일이었다. 실속 없는 집은 허우대만 멀쩡했다. 실내로 난 계단과 높은 천장, 그리고 허술한 벽 사이로 집 안 온기가 술술 빠져나갔다. 옷을 두 개씩 껴입고도 종일 벌벌 떨고 다녔다. 남자의 품 안에서도 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학강단에 서고 싶은 남자는 시간강사를 전전하고 있었다. 나는 대가족이 모여 사는 일층과 이층을 하루 종일 오르내렸다. 집들이를 온 친구가 네가 이렇게 살 줄 몰랐다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마음까지 한속이 들었다. 달콤한 향에 취해 시작한 결혼생활은 복숭아털처럼 까슬거리는 일들 천지였다.     


골목 사람들     

집집마다 새댁들이 세를 들어 살았다. 방 한 칸 월세부터 독채 전세까지 주인보다 세입자가 더 많았다. 새댁들은 결혼 시기와 나이가 비슷했는데 남편 직장을 따라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골목을 마주 보고 붙어 있어 눈만 뜨면 마주쳤다. 줄곧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나는 사방에 깔려 있는 시선에 숨이 막혔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 같아 외출마저 꺼렸다. 안이나 밖이나 사생활 보장이란 사치스런 용어에 불과했다. 번듯한 직장만 잡으면 서울로 떠나리라. 새댁들은 집 있는 나를 부러워하고, 나는 직장 가진 남편을 둔 그들이 부러웠다.


집집마다 아이가 태어났다. 새댁들은 밖으로만 나가려는 아이들을 데리고 길 한쪽에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종일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왁자했다. 그 대열에 끼지 못한 나는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거나 떼를 쓰며 우는 아이 엉덩짝을 두들겨 패는 새댁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간혹 열린 현관문으로 무리에서 빠져나온 아이가 엉금엉금 계단을 기어올랐다. 나는 후다닥 뛰어 내려가 아이의 말강한 몸에 코를 박고 살냄새를 맡았다. 


시샘 때문이었을까. 담장에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계절에 나도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된다는 건 부른 배 만큼이나 품이 넓어지는 일인지. 그 이름만으로도 충만했다. 새댁들 속에 끼어 앉고 싶어 안달이 나는데 시간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갔다. 기미가 앉은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고 나갈 날을 기다렸다. 조리기간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받쳐 들고 뻔질나게 대문을 드나들었다. 그도 모자라 유모차를 끌고 길이 난 곳은 어디든 쑤시고 다녔다. 골목 지도를 그릴 수 있을 만치 동네가 익숙해졌다. 사람들과도 눈을 맞추었다. 


아이 하나를 기르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은 골목에서 자랐다. 어른들은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도록 방지턱을 만들고 돌봄이 필요할 때면 누구라도 나서 아이들을 보살폈다.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을 등에 업은 아이들은 어디든 제 집처럼 드나들며 어울렸다. 잠시 머물다 떠날 기회만을 엿보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에게 이곳은 고향이었다. 고장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무관심했던 어른들은 아이들 손을 붙잡고 지역 탐방에 나섰다. 그때야 비로소 복숭아밭을 보았다.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 복사골이라 불렀다는 소사. 소사명산이라 이름 붙인 복숭아가 전국 최고의 생산량을 기록했다는데 국어 선생님은 그 쯤 이곳에 왔을까. 오십 년 전 부천군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이 되면서 복숭아밭은 사라지고 그 명성도 잊혀져 갔다. 과거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춘덕산 복사꽃이 쓸쓸해 보였던 이유는 상상으로 그리던 낭만 때문이었으리라.      


사람이 풍경이 되다       

90년 대 초 중동 신도시 입주가 시작되었다. 아파트를 분양 받은 새댁들이 하나 둘 골목을 떠났다. 넋 놓고 있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이 차곡차곡 주택부금을 붓는 사이 나는 굼벵이처럼 집을 파먹고 지낸 꼴이 되었다. 대책 없이 집을 내놓고 아파트를 보러 다녔다. 그사이 서울의 집값은 아무리 점프를 해도 닿지 못할 만치 치솟아 있었다. 돈의 가치로만 환산되는 모래성 앞에서 나는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높은 곳에 열려있는 포도가 시어서 따먹지 못한다는 여우처럼 땅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어머니를 핑계 삼아 눌러 앉았다.


몇 해가 지난 후에야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거대한 마을은 사람이 풍경이 되는 골목과는 달랐다. 콘크리트 벽은 사생활이 밖으로 새 나오지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게 막아냈다. 땅집 맛을 본 나는 회색공간에 갇혀 버린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이곳에 온전히 정착하게 된 터에 손 놓고 벽만 바라보고 있을 일은 아니었다. 벽을 허물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도서관에서 독서 동아리 활동을 하던 나는 회원들을 부추겼다. 복지관과 손을 잡고 지역신문을 발행하기로 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사람풍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005년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호가 거듭될수록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자본이 최고인 세상에 사람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나누고 싶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와 믿음, 그리고 손을 잡아주고 함께 나아가는 용기 같은 것 말이다. 지역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숱한 사람들을 만났다. 평범하게 사는 누구라도 조명을 비추면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각자 저만의 역사를 지닌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신문과 함께 한 이십여 년 동안 소사를 물들였다는 복숭아나무처럼 나의 뿌리도 단단해졌다. 


그 무렵 문학회를 만났다. 한국부천작가회의 전신인 복사골문학회는 문학의 언저리를 기웃대던 내게 수필이라는 글밭을 선사했다. 호기롭게 발을 내딛었지만 제대로 씨를 뿌리지 못해 포기하고 싶을 때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행운처럼 만난 문학이 언제나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가리라는 사실을. 그사이 부천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학창의도시가 되었다. 올해로 삼십팔 년째 나는 문학도시 시민으로 살고 있다. 그때 서울이라는 신포도를 따먹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 소사에 대한 사춘기 소녀의 상상력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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