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집
국어시간이었다. 문법수업에 지루해진 아이들이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며 선생님을 졸랐다. 선생님은 운동장 너머 살곶이 다리를 바라보며 기차를 타고 복숭아밭에 갔던 추억을 더듬었다. ‘소사’는 기차를 타고 가야 할 만큼 먼 곳인가 보았다. 복숭아와 연인과 기차.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 이름이 복숭아 즙처럼 입안에 스며들었다. 열다섯 사춘기가 시작되던 때였다.
남자가 사는 곳이 바로 소사였다. 그사이 지명이 부천으로 바뀌고 기차 대신 전철과 버스가 다녔다. 나는 버스를 타고 남자를 찾아갔다. 낮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공항동 끝자락에 불쑥 솟은 김포공항이 보였다. 공항 옆길 활주로가 있는 담장을 끼고 돌자 서울과 부천의 경계인 오쇠동 삼거리가 나왔다. 이정표에 왼쪽은 고강동, 오른쪽은 오정동이라 쓰여 있는데 도로 옆으로 먼지를 뒤집어쓴 허름한 집들이 나타났다. 마당에는 손때 묻은 살림살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곳도 있고 주인을 잃었는지 제멋대로 나뒹구는 곳도 있었다. 한껏 치장을 한 공항과는 대조적이었다. 버스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내달렸다. 건물은 보이지 않고 퍼즐 조각을 맞춰 놓은 듯 이어진 논이 펼쳐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촌락이 나올 것만 같았다. 길을 잘 못 들었을까. 내 불안은 아랑곳없이 물 담긴 논 속으로 풍경이 밀려갔다.
한참을 달리다 들판이 끝나는 지점에서 버스가 멈췄다. 사람들 틈에서 고개를 내밀고 서성이는 남자가 보였다. 종로와 광화문을 함께 쏘다니던 그가 초행길 동네처럼 낯설었다. 뒤통수를 긁적이며 앞서 걷던 남자가 오른쪽은 안동네, 왼쪽은 새 동네라며 손짓을 했다. 그가 사는 곳은 단독주택이 모여 있는 새 동네였다. 골목을 따라 걸으니 철조망이 둘러쳐진 막다른 길이 나왔다. 그 너머는 미군부대라 했다. 그는 어쩌다 이곳까지 왔을까.
그 해 겨울
80년대 초, 남자의 어머니는 대대손손 살아오던 터를 정리했다. 서울에 있는 아들 곁으로 오기 위해서였다. 당시 서울의 아파트와 부천의 주택은 비슷한 가격대였다. 편리하다는 아파트에 귀가 솔깃했지만 다달이 내야 하는 관리비가 부담인데다 묵은 살림을 놓을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단독이라면 자식들이 모여 살 수도 있고 고향 떠난 허전함을 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개발붐을 타고 땅값이 뛰리라는 기대도 한몫했다. 얼마 후 팔고 온 농토 옆으로 일죽 톨게이트가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문전옥답과 맞바꾼 새 터는 몇 해가 지나도 헛기침만 해댔다. 어차피 부대 옆 집값이 오르기란 애저녁에 그른 일이었다.
남자의 집은 이층 양옥이었다. 골목을 따라 쌍둥이 같은 집들이 양쪽으로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열린 대문 옆에 풍성한 잎을 달고 있는 고염나무가 보였다. 남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한쪽에 피어있는 함박꽃처럼 마음은 온통 연분홍으로 물들었다. 그해 겨울 그 집 이층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실속 없는 집은 허우대만 멀쩡했다. 실내로 난 계단과 높은 천장, 그리고 허술한 벽 사이로 집 안 온기가 술술 빠져나갔다.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나는 옷을 두 개씩 껴입고도 종일 벌벌 떨고 다녔다. 남자의 품 안에서도 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학강단에 서고 싶은 남자는 시간강사를 전전했다. 나는 대가족이 모여 사는 일층과 이층을 종일 오르내렸다. 집들이에 온 친구가 네가 이렇게 살 줄 몰랐다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마음까지 한속이 들었다. 달콤한 향에 취해 시작한 결혼생활은 복숭아털처럼 까슬거리는 일들 천지였다.
말캉한 살냄새
집집마다 새댁들이 세를 들어 살았다. 방 한 칸 월세부터 독채 전세까지 주인보다 세입자가 더 많았다. 새댁들은 결혼 시기와 나이가 비슷했는데 남편 직장을 따라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골목을 마주 보고 붙어 있어 눈만 뜨면 마주쳤다. 사생활 보장이란 사치스런 용어에 불과했다. 사방에 깔려 있는 시선에 숨이 막혔다. 번듯한 직장만 잡으면 서울로 떠나리라. 새댁들은 집 있는 나를 부러워하고, 나는 직장 가진 남편을 둔 그들이 부러웠다.
집집마다 아이가 태어났다. 새댁들은 밖으로만 나가려는 아이들을 데리고 길 한쪽에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종일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왁자했다. 그 대열에 끼지 못하고 커튼 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삼 년이 지나도 태기가 없던 나는 떼를 쓰며 우는 아이 엉덩짝을 두들겨 패는 새댁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간혹 열린 현관문으로 무리에서 빠져나온 아이가 엉금엉금 계단을 기어올랐다. 나는 후다닥 뛰어 내려가 아이의 말캉한 몸에 코를 박고 살냄새를 맡았다.
시샘 때문이었을까. 담장에 장미꽃이 탐스럽게 피어날 무렵 나도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된다는 건 부른 배 만큼이나 품이 넓어지는 일인지. 그 이름만으로도 충만했다. 하루라도 빨리 새댁들 속에 끼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인데 시간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갔다. 기미가 얹은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고 나갈 날을 기다렸다. 조리기간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받쳐 안고 새댁들이 모인 자리를 기웃댔다. 그도 모자라 유모차를 끌고 길이 난 곳은 어디든 쑤시고 다녔다. 골목 지도를 그릴 수 있을 만치 동네가 익숙해졌다. 사람들과도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이 하나를 기르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아이들은 골목에서 자랐다. 어른들은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도록 방지턱을 만들고 돌봄이 필요할 때면 누구라도 보살폈다.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을 등에 업은 아이들은 어디든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잠시 머물다 떠날 기회만을 엿보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에게 부천은 고향이었다. 고장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무관심했던 어른들은 아이들 손을 붙잡고 지역 탐방에 나섰다. 그때야 비로소 복숭아밭을 보았다.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 복사골이라 불렸다는 소사. 소사명산이라 이름 붙인 복숭아가 전국 최고의 생산량을 기록했다는데 국어 선생님은 그 무렵 이곳에 왔을까. 오십 년 전 부천군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이 되면서 복숭아밭은 사라지고 그 명성도 잊혀져 갔다. 과거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춘덕산 복사꽃이 쓸쓸해 보였던 이유는 상상으로 그리던 낭만 때문이었으리라.
경유지가 아닌 종착점
90년 대 초 중동 신도시 입주가 시작되었다. 아파트를 분양 받은 새댁들이 하나 둘 골목을 떠났다. 넋 놓고 있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이 차곡차곡 주택부금을 붓는 사이 나는 굼벵이처럼 집을 파먹고 지낸 꼴이 되었다. 대책 없이 집을 내놓고 아파트를 보러 다녔다. 그사이 서울의 집값은 아무리 점프를 해도 닿지 못할 만치 치솟아 있었다. 나의 안일함을 탓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돈의 가치로만 환산되는 시멘트벽 앞에서 나는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골목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난 후에야 신도시로 이사를 했다. 거대한 마을은 사람이 풍경이 되는 골목과는 달랐다. 콘크리트 벽은 사생활이 밖으로 새 나오지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게 막아냈다. 땅집 맛을 본 나는 회색공간에 갇혀 버린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이곳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손 놓고 벽만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벽을 허물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길을 찾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독서 동아리 활동을 하던 회원들과 지역신문을 만들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신문 이름이 ‘사람풍경’이었다. 주인공은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제 잘난 맛에 취해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던 나는 그때서야 그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가는 곳마다 역사가 있고 사람이 있었다. 근거 없는 지역 폄하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느라 가려졌던 눈이 뜨였다. 도망갈 궁리에만 급급했던 나와 달리 그들에게 이곳은 경유지가 아닌 종착점이었다. 안다는 것은 애무한다는 것이라는 니체의 말처럼 사람들과 몸을 부비고 때로는 부대끼며 정이 쌓여갔다.
문학도시
부천과 인연이 깊은 문인들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민족시인 수주 변영로를 비롯하여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아동문학가 목일신, 80년대 현대 소설의 대표 양귀자, 여성작가로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벅 등이었다. 나는 문인들이 몸담고 살았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작품 배경 속에서 그들을 만났다. 복사골문학회 문을 두드릴 수 있었던 이유도 장소의 힘 때문이었다.
수필이라는 글밭에 호기롭게 뛰어들었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서툰 호미질은 엄한 곳만 긁어댔다. 글 앞에만 서면 세상 초라하고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럴 때마다 고랑에 털썩 주저앉아 포기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자존심으로 버티고 다음은 오기로 버티고, 그 다음은 긁어대야만 살 것 같은 절박함으로 버텼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호미질이 잦을수록 흙이 부드러워지듯 소사는 척박한 글밭을 비옥하게 만들어준 내 문학의 토양이었다.
그사이 부천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학창의도시가 되었다. 문학창의도시란, 그 도시와 도시의 사람들이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며 창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구석구석 백여 개가 넘는 도서관이 들어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민들의 생활 속에 문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올해로 삼십구 년째 문학도시 시민으로 살고 있다. 나처럼 태생지를 떠나 타지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으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까. 돌이켜보면 국어선생님의 복상아 밭 추억이 있던 소사에 정착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신이 우연히 머물게 된 곳은 어디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