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보 농부의 아내다. 농사보다는 화단에 무슨 꽃을 심을지가 늘 우선이다. 깨 씨를 뿌릴 때도 농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먹을 만큼만 해요, 아픈 다리는 어쩌려구.”라며 참견을 늘어놓았다. 의욕이 앞선 농부는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시큰둥하던 나도 언제부턴가 밭쪽으로 시선이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흙을 밀어 올리고 줄기가 올라왔다. 두 개의 둥근 떡잎이 손을 펴듯 열리더니 그 위로 톱니 모양의 본잎이 자라났다. 작은 몸짓이 마치 희미한 숨결처럼 느껴졌다. 그 위에 맺힌 아침 이슬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생명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서로를 밀치며 자라는 모습이 볼수록 신기했다.
처음엔 내 알 바 아니라며 등을 돌렸다. 그러나 솎아내지 않으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살릴 것과 뽑을 것이 내 손끝에 달렸다.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싹들을 조심스레 뽑아냈다. 숨통이 트인 싹들은 바람 한 줄기에도 살이 오르고 잎겨드랑이마다 연분홍빛 꽃이 피어났다. 꽃이 진 자리에는 꼬투리가 맺혔다. 그 변화 앞에서 농부에게 퍼붓던 타박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나는 어느새 밭 주인이라도 된 양, 벌이 윙윙거리는 사이를 느릿느릿 거닐었다. 올해는 깨가 풍년일 거라더니 줄기마다 꼬투리가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보기만 해도 흡족할 정도의 수확이 기대되었다. 그 기쁨도 잠시, 노린재떼가 몰려들었다. 해충은 날마다 늘어갔으나 농부는 약을 치지 않겠다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녀석들의 움직임이 느려지는 이른 아침과 해질 무렵, 밭에서는 전쟁이 벌어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해충들은 날개를 펴고 달아났다. 농부는 숨을 죽이고 줄기 사이를 기웃댔다. 나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꿈틀대는 그것들을 만질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멀찍이서 지켜만 보았다.
해충의 습격과 땡볕 속에서도 열매는 익어갔다. 시기를 놓쳤다간 알갱이가 흙으로 쏟아질 판이라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급한 마음에 무턱대고 낫을 들고 달려들었다. “아서라, 해뜨기 전에 비어야 깨가 쏟아지지 않는다네.” 앞집 부부의 귀뜸에 조급함을 삭이며 시든 이파리만 훑어냈다. 다음날 아침 눈 뜨기 바쁘게 밭으로 나갔다. 한 속에 나왔어도 자라는 속도는 제각각이라 거두는 순서도 달랐다. 황갈색으로 변한 꼬투리를 찾아 베어갔다. 허리는 아파 오고, 모기는 물고, 땀은 줄줄 흘러내렸다. 돈 주고 사 먹으면 편할 것을, 왜 고생을 사서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농부의 정성을 생각하면 낫을 놓을 수 없었다.
깻대를 묶어 삼각꼴로 세웠다. 자세히 보니 사람 ‘인(人)자’ 와 닮았다. 홀로 선 듯 보이지만 서로 기대야 비로소 완전한 모양이 되었다. 국산 깨는 씨알 구경조차 쉽지 않다는 도시 지인들의 얼굴이 단 위로 그림자처럼 겹쳐졌다. 한낮이면 나도 그 틈에 들어가 햇빛이 잘 들도록 깻단을 안고 돌았다. 빛은 사람인 나까지 말릴 태세로 쏟아지다 이내 먹장구름 속으로 숨곤 했다. 언제 비가 쏟아질지 모르는 하늘을 수시로 올려다보다 결국 비닐로 지붕을 만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덮개가 아니라 자연과 사람 사이에 걸린 얇은 막 같았다. 사방으로 줄을 달아 묶자 그 틈으로 바람길이 열렸다. 바람을 머금은 비닐은 깻단을 품고 종일 몸을 풀었다. 터져 나온 깨알들이 깔아놓은 포장 위에 모래알처럼 깔렸다.
그 너머 화단에는 백일홍이 피어 있고, 담장 위 고양이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졸고 있었다. 모든 생명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당은 더없이 평온했다. 화단 머리로 바람 한 점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 결에 씨앗을 뿌리고 기다리며 거두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손끝으로 느껴지던 흙의 질감, 잎 사이로 스며들던 햇살, 바람에 흔들리는 꼬투리의 떨림까지 모든 감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흙은 단지 씨앗을 키우는 곳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 길러내는 마력을 품고 있었다.
마침내 비닐을 걷어내고 타작을 한다. 휘두른 막대기 끝에서 촤르르, 촤르르 깨알들이 쏟아진다. 사서 한 고생이라는 생각은 일시에 무너진다. 눈앞에 쌓이는 땀방울의 결실은 금은보화나 다름없다. 손 안대고 얻을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온몸으로 깨닫는 순간이다.
깨가 서말이라도 볶아야 제맛일 것이다. 사람도 그처럼 함께 어울릴 때 비로소 제맛이 난다. 서로 기대어 선 깻단처럼 사람들에게서 받았던 온기를 이제 되돌릴 차례다. 깨 한 줌을 건네는 일은 내게 볕과 바람, 기다림으로 익은 시간을 전하는 마음이다. 깨 봉지를 들고 이웃집 문을 두드릴 생각에 도리깨를 다시 힘껏 내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