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래 에세이 1] 내가 안녕히 살아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새해 정초부터 기가 막히게 체를 했다. 원래 달고 살아서 괜찮으려니 했지만 온통 머리가 찢겨 나가는 것처럼 두통이 심해서 괜찮지 않았다. 지난해를 마무리하고 올해 계획을 곱씹어보며 고상한 상념에 빠져볼 겨를도 없이 내 머릿속은 통증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새해의 낮 시간을 아쉽게 보내버리고 저녁이 되어서도 체한 것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파는 내게 오-피스 마감을 하고 오라고 했다.
매번 마파가 하던 일이었지만 걸어서, 살짝 뛰어서 다녀오면 아이들 보는 것보다는 좀 낫고 체기도 내려가지 않겠냐는 제안. 나는 너무나 기력이 없어 고민했지만 머리가 정말 깨져버릴 것 같았고 아이들 목소리도 들어오지 않아 패딩을 얼른 걸치고 집을 나섰다.
어두운 밤 시간에 나 혼자 산책(?)은 내 인생 손꼽아 볼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집에서 오-피스로 가는 길은 꽤나 아름다운 길이다. 밤인데도 대섬의 바닷물은 빛이 나고 바닥에 깔린 작은 돌멩이들까지 다 보일 정도로 깨끗해서 그나마 머리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손님들에게 추천해드리긴 했지만 ‘역시나 아름다운 길이군’ 하며 빠른 걸음으로 대섬을 지나치자 마파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바쁜 마음에 여보세요 도 없이
-응, 잘 가고 있어. 읍사무소 정류장 앞이야.
-그럼 이제부터 오르막이니까, 뛰어 ㅋㅋㅋ
-ㅋㅋㅋ알겠어
나는 정말 뛰었고 더 이상 뛸 수 없이 숨이 차오르자 잠시 멈추고 가파른 언덕 중간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오징어 배 몇 척 반짝반짝 대는 살짝 어둡고 정감 있는 조천리 앞바다인데 오늘은 세상 환했다. 엄청나게 밝은 빛이 조천리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순간, 이틀 전 제주항 앞바다에서 어선 한 척이 풍랑에 의해 부두에 충돌하며 선장과 선원 7명이 실종했다는 기사가 생각이 났다. 생각해보니 낮에는 구조헬기 하나가 한적한 조천 앞바다를 홀로 바쁘게 지나다니던 생각이 났다. 제주는 며칠간 태풍처럼 강한 바람이 집어삼켰었는데 바람이 잔잔해진 오늘, 해경들은 바쁘게 사라진 사람들을 찾는 것 같았다.
그 조명탄에서 한참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무서운 길이라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어 시선을 거두고 다시 오피스로 향했다. 열심히 마무리를 하고 또 그 길을 걸으려 나섰는데 이제는 그 환한 바다가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대낮처럼 환한 바다. 사라진 7명을 찾기 위한 강하고 조용한 빛. 저 밝은 빛 아래서 조용한 바다는 뭐라 말하고 있을까.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안 그래도 아무도 없는 그 길이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때마침 마파가 또 전화가 왔다.
-이제 다했어, 얼른 갈게.
전화 너머로 막내 유하의 우는 소리가 들린다. 집에 계속 있었으면 저 빛을 보지 못했을 텐데...
돌아오는 길 내내, ‘생명’ ‘안녕히 살아있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련한 조명탄은 ‘ 나의 연약함, 지극히 개인적인 나, 흔들리는 나’를 더욱 부추겼다. 흐릿하고 기력 없이, 그럼에도 무탈하게 지내온 나의 시간들을 더욱 밝혀주었다.
다시 마주한 대섬 앞에 섰을 때, 조명탄은 보이지 않고 조명탄으로 인해 해무리처럼 희미한 주홍빛의 하늘이 보였다.
‘주홍빛 하늘, 저 희미함이 결국에 저 빛과 다 연결되었네’
나는 그 희미한 빛과 마주하며 ‘안녕히 살아있구나’를 느꼈다. 사람을 살리려고 쏜 조명탄에 오히려 나는 살아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는 사실에 그 바다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졌다. 그러면서 무수하고 보이지 않지만 강렬하게 살기 위해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안녕히 살아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저 ‘조명탄’과 같은 강렬한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다. 희미해서 깨닫지 못할 뿐, 우리는 결국에 빛의 길로 연결되어 있다. 집 앞에 도착하니 현관문 너머 유찬, 유솔이 가 뛰어다니는 소리, 유하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온다. 열렬히 살아있는 우리.
정직한 사람에게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비칠 것이다. (시편 112:4)
When darkness overtakes him, light will come bursting in. (Psalm 112:4)
세상의 암흑이 클지라도 우리는 각자의 빛을 찾아야만 한다. (스탠리 큐브릭, 영화감독, 1928-1999)
However vast the darkness, we must supply our own light. (Stanley Kubrick, Film Director, 1928-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