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교육대기획 학교란 무엇인가, 노는 아이들의 기적 서머힐 학교
“joie de vivre(주아 드 비브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몸 어느 한 구석에 소중하게 문신으로 새기고 싶을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이 말은 프랑스 사람들이 ‘행복’이라는 단어 대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우리말로 옮기면 ‘삶의 기쁨’쯤 된다고 한다. 너무 멀어 우리의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된 행복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순간순간 속에서 사소한 기쁨을 발견해 내는 것. 이를테면, 아침에 알람 없이 개운하게 일어났을 때의 상쾌함. 예상보다 해야 할 일들이 일찍 마무리되어 조금 이른 식사를 하고,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가볍게 산책할 때의 편안함. 바람을 타고 오는 꽃향기에 봄이 왔음을 마음속 깊이 느끼는 즐거움. 이런 감정과 시간들을 무던하게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삶의 기쁨으로 소중하게 여기고자 하는 마음이 ‘joie de vivire’라는 말속에 담겨 있다.
이 말이 내 인생의 모토가 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작년 겨울만 해도 나는 무기력감과 우울함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또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좋아서 선택했지만 어느새 무거운 짐이 된 전공과목과, 새로 진입한 이중전공 수업 때마다 느껴지는 무언의 벽, 학회장으로 여러 사람을 상대하고 이끌어나가야만 하는 부담감. 이 모든 것들 속에서 내 삶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참 많이 울고, 화내고, 속을 썩였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할 일’들 속에서 허둥거리느라 정작 내가 어떤 기분인 지 돌볼 시간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힘든 학기를 마치고, 방학 동안 나는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내 삶을 차근차근 보살피기 시작했다.
읽고 싶은 책을 사 읽고, 내가 쉬고 싶을 때에 쉬는 일. 또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벼르고 있다가 아주 소중한 사람과 먹으러 가는 일. 마음의 건강과 함께 몸의 건강도 챙기는 일까지. 아주 사치스러울 정도로 행복으로 가득한 한량 생활을 하며 조금씩 ‘나’와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뒤에야 비로소 나는 지난겨울 왜 그토록 힘들어했을까를 곰곰이 떠올려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내 스스로에게 너무도 미안해지는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22년의 인생을 살며 나는 친구의, 선생님의, 그리고 가족들의 기분을 살피고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데에는 달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평생을 함께 할 나 자신이 언제 행복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내가 느끼는 순간의 감정들에 집중하며 살아가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나의 삶은 기계적으로 일어나 밥을 먹고,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어떤 일을 할 때에 내 감정이 어떠한지를 더 집중해서 느끼는 일부터가 출발점이었다. 그렇게 느낀 감정들을 차분히 앉아 분류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나는 상대방이 이런 말을 할 때에 상처를 받는구나, 나는 아무도 없는 공원 벤치에 앉아 바람을 맞을 때 행복하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여야만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이렇게 나와 가까워지는 연습을 통해, 나는 점점 더 행복한 일상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작년 겨울처럼 수업은 여전히 힘들고 해야 할 일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작년의 내가 흠뻑 빠져있던 우울의 바다를 건너, 행복이라는 말이 지겨울 정도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절대적인 행복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아주 작은 삶의 기쁨들인 것이다.
이렇게 내가 22년 만에야 할 수 있게 된 일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배우는 곳이 있다. 90년의 전통을 가진 영국의 대안 학교 ‘서머힐’이 바로 그곳이다. 텅 빈 교실 그리고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교실을 지키는 선생님들과 제 집 마냥 숲 속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이곳이 학교인지 놀이터인지를 묻는 질문에, 멋진 놀이터가 있는 학교라고 대답하는 해맑은 미소. 학교에서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이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누구의 간섭이나 통제도 받지 않는 서머힐 학교의 아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의 유년시절은 행복해야 하며, 단순히 책에 쓰여 있는 것보다는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한다.”는 설립자의 철학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모습이다.
서머힐 학교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인생을 배운다. 자유롭게 행동하고 그 행동에 책임을 지는 법, 평등한 권리를 지닌 개인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행해야 하는 의무, 그리고 삶의 기쁨과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들까지. 어떤 사람은 평생을 살면서도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들을 이 아이들은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배우고 있다. 서머힐 학교를 본 따 생겨난 일본의 키노쿠니 어린이 마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프로젝트 수업을 통해 스스로 먹을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멋진 오두막을 뚝딱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울기도 다치기도 하지만 금세 밝은 표정을 되찾는다. 매일매일 즐겁다고 느끼며,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고, 내일이 너무나도 기다려지는, 그런 살아있음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서머힐의 수업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서머힐 학교는 과연 교육기관으로의 책임을 다 하고 있는가? 이런 회의적인 시선을 향해 서머힐 학교의 학생과 학부모들은 멋진 한 방을 날려준다. 서머힐 학교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냐는 질문에 100%의 학부모가 (99.9%가 아니라 100%다!) ‘그렇다’고 응답하였으며, 학교를 떠난 졸업생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서머힐의 방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또 영국 교육청의 대대적인 검열로 떠들썩한 시기를 보내고 8년 뒤, 서머힐은 정부가 제시한 모든 기준에서 합격 평가를 받았다. 서머힐을 졸업한 모두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명인은 아니다. 그렇지만 서머힐을 졸업한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성격심리학의 거장 에릭슨(Erik Homburger Erikson)이 강조했던 것처럼 놀이에 온전히 몰입하여 진짜 즐거움이 무엇인지 깨닫는 일은 정말로 중요하다. 그리고 그의 말이 옳았음을, 즐겁게 놀 줄 모르는 사람은 즐겁게 공부할 수도 없다는 것을 서머힐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에서 순위권을 다투는 학업 성취도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학교는 어떨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총 12년. 한국의 학생들은 그 길고도 긴 시간을 머리가 터져라 공식을 외우고, 살면서 한 번이나 써먹을까 말까 하는 지식들을 암기하는 데에 허비한다. 아이들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가두는 우리의 학교에서는 삶의 기쁨은커녕 삶의 불행만을 혹독하게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웃어도 지워지지 않는 우울의 그림자를 달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토록 험난한 경쟁과 고난의 시간을 지나 이름을 대면 모두가 알 만한 대학에 왔지만, 정작 국수 삶는 법 하나 알지 못해 나의 얼굴을 무안하게 쳐다보기만 하던 한 친구의 얼굴도 머릿속을 스친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그 가르침이 정말 아이들의 삶에 있어서 유의미한 것일까? 복잡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부유한다.
우리는 순간의 기쁨을 찾기보다 그것을 억압하고 꾹꾹 눌러놓는 일에만 익숙해져 왔다. 오늘보다는 내일, 올해보다는 내년으로 나의 행복을 자꾸만 미루게 된다. 그러면서 내 삶은 왜 이렇게나 불행한 걸까 하며 자기연민에 빠져든다. 오랜만에 만난 주위 사람들과는 마치 불행 배틀이라도 하듯 서로의 고충을 토로하기에 바쁘다. 삶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우리들을 이토록이나 처량하게 만든 주범은, 바로 학교다. 나의 안, 내 삶의 안이 아니라 자꾸만 그 바깥에 있는 것들을 쳐다보도록 고통스러운 훈련을 시킨 것은 바로 우리의 학교이다. 병든 학교와 병든 사회 속에서 아이들은 그리고 그 아이들의 미래인 어른들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적어도 우리가 서머힐 같은 학교에 우리의 아이들을 마음껏 맡기고 싶다면, 그에 선행하여 혹은 그와 함께 사회 구조 전반에 걸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농부’로 살더라도 삶에서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행복할 수 있는 사회.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농사지으며 살아갈 땅을 마련할 수 있고, 또 그곳에서 원하는 사람들과 원하는 일을 하며 만족할 수 있는 세상. 내가 언제 기쁜지, 웃을 수 있는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위해서. 아이들과 어른들을,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의 교실은 그리고 우리의 사회는 반드시 바뀌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당장 사회의 변화를 논하기에는 갈 길이 한참이나 멀었다. 그보다도 아주 작은 것부터.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행복’의 가치를 똑바로 바라보는 연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없는 행복을, 억지로 꾸깃꾸깃 만들어내자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들에 눈 감고 무감각해지자는 것이 아니라. 내 눈 앞에 있는 행복을 유예하지 말고, 또 내가 가지고 있는 행복을 폄하하지도 말자는 그런 다짐. 동시에 다른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을 나의 시선이나 잣대로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말자는 더 굳은 다짐. 길에 떨어지는 낙엽을 치우는 일이든, 공사장에서 무거운 벽돌을 나르는 일이든. 어떤 일을 하며 그 사람이 행복하다면 그에 맞게 대우해주고 그를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존경하는 연습이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이렇게 나의 타인의 오롯한 행복을 존중하고 바라볼 때에, 우리의 학교는 그리고 우리의 사회는 훨씬 더 행복하게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서머힐이 나에게 남긴 것은 바로 이런 행복으로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