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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밍 Dec 01. 2018

우리, 뱁새들을 위하여

나난나나 나도 좀 날아보자 나도 새다



  '뱁스터'*라는 요즘의 유행어를 들어본 적이 없더라도.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는 속담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말들에서 쉬이 유추할 수 있듯이, 그리고 당신이 이미 알고 있듯이. 줄곧 우리들의 뱁새는 '모자람'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어 왔다. 


  몸집이 1m 12cm에 달하는 황새와는 달리, 그 반의 반보다도 작은 몸집을 지닌 뱁새. 다 해봤자 13cm가 고작인 그 조그마한 몸을 가지고서.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황새를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질 위기에 처하고야 마는, 우리의 뱁새. 


  그리하여 선조들이 남긴 옛 속담이 전하고자 하는 교훈은, '스스로의 분수를 알고 그것을 지켜라'하는 것이다. 안 되는 건 애초에 안 되는 거니까. 괜한 헛수고나 노력을 들이지 말라고. 저 멀리 잘 나가는 황새를 따라 하려다가는, 언젠가는 네 가랑이가 찢어지고야 말 테니까. 네 분수에 맞게, 네 처지에 맞게. 너의 한계를 알고 그 자리를 가만 지키기나 하라고. 


  이 오래된 가르침을 공손히 따르는 우리들은 쉬이 스스로를 뱁새로 비유하며 '빠른 포기'를 선언하고는 한다. 이렇게 자신을 희화화하는 말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자 하는, 그리하여 스스로의 이른 포기를 합리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자아의 뱁새화'는 스스로를 영영 작은 울타리 안에 가두고야 만다. 


  '네 자리는 여기니까. 여기보다 더 먼 곳으로 날아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그 무시무시한 선언 아래에서. 우리는 훨훨 날지 못하는 초라한 새로 전락하고야 마는 것이다.




 


  언제까지였을까. 어릴 때에는 나 자신을 황새라 여기며 살아왔다. 조금만 노력을 기울여도, 남보다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일들이 많았다. 다른 친구들이 기를 쓰고 끙끙대며 덤벼들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고 마는 일들도, 나에게는 당연하고 평범한 일들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운이 좋게 뱁새가 아닌 황새로 태어난 덕에. 남은 날들도 평탄한 길의 연속이겠구나. 그렇게 섣부른 판단을 내리던 때가 있었다.


  이제 나는, 내가 황새가 아님을 안다. 분명 어떤 면에서는 황새처럼 남들보다 유리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쯤은 아는 나이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스스로가 유독 뱁새처럼 작고 하찮게 느껴지는 순간이 자꾸만 늘어갔다. 그렇다. '자아의 뱁새화'가 시작되고야 만 것이었다. 

 

  몇 달을 괴로워하며 완성해낸 나의 소설들은 보기 좋게 공모전에서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는데. 내가 아는 그 사람의 작품은 늘상 당연하다는 듯이 반짝이는 대상 타이틀을 거머쥘 때. 쏟아지는 칭찬 세례 속에서 빛나는 웃음을 짓고 있는 그 사람을 보았을 때. 하루에도 수십 권씩 새로운 책들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오는데. 내가 쓴 글들은 결국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는 곳으로 흩어져버리는 것 같을 때. 


  나는 왜 그이가 아닐까. 나는 왜 저들이 아닐까. 나는 왜 황새가 아닌 뱁새인 걸까. 나는 왜... '나도 쟤처럼 넓은 둥지에 태어났다면, 쟤처럼 비싼 깃털이 남아돈다면, 쟤처럼 힘센 날개를 달아본다면'* 그리고 또, 나도 쟤처럼...


 내가 내 자신을 뱁새로 여기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끝없는 추락의 연속이었다. 나는 여기까지인 거구나, 내 능력의 한계는 바로 이 지점인 거구나. '내가 나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들,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것들, 결국에는 해내지 못할 것들에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내가 나인 것이 싫었고, 그들이 그들인 것이 부러웠다. '쟤처럼' 태어났다면, 이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훨훨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좀처럼 끊이지를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뱁새라는 사실을. 나는 언제까지나 저 멀리 푸른 하늘로,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날아갈 수 있는 존재라 믿어왔는데. 날기는커녕, 바닥에서 지하로. 지하에서 또 저 멀리 어둠으로.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꼴이라니. 


  그렇게 어둠의 밑바닥까지 내려앉은 순간. 비로소 '분수를 알고 만족하라'는 말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타고난 분수를 알라는 그 말이, 그렇게나 싫을 수가 없었다.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 줄 알고. 네가 감히 그런 말을. 실은 뱁새가 얼마나 귀엽게 생겼는지도 잘 모르면서. 


  단숨에 멀리까지 날지는 못하더라도, 아무리 몸집이 작고 다리가 짧더라도. 뱁새도 새인 것이다. 그 앙증맞은 생김새로 우주의 평화를 가져올 만큼 귀여운 건 물론이고. 뱁새도 분명, 날 수 있다. 설령 황새가 하루 만에 날아갈 거리를 뱁새가 열흘 동안 날아간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날갯짓을 하지 않는 황새보다는, 그리고 지레 포기하여 제자리에 눌러앉기로 결심한 뱁새보다는, 멀리 날아갈 수 있다.  


  나의 한계는 선조들이 남긴 속담에 의해 정해진 것도, 황새처럼 멋들어지게 날고 있는 이들이 선언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한계는 '나는 여기까지인가 봐'라고 생각하는 스스로의 마음속 울타리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나를 포기하는 순간. 내가 나를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하찮게 여기는 순간. 그때야말로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새로 전락하는 순간임을, 오랜 어둠 속에서 배웠다.


  황새가 아님에 절망하지 말고, 뱁새인 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그리고 '뱁새이기 때문에' 더 치열히 그리고 부지런히 날갯짓을 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나를 조금 더 아끼고 보듬으며 귀엽게 여겨주기. 그것이 뱁새로 태어난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 뼘 더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 뱁스터는 뱁새와 힙스터(Hipster)의 합성어이다. '최신 유행에 민감하면서도 대중적인 흐름과는 거리를 두는' 힙스터가 되고자 하나, 늘 그들을 한발 늦게 뒤쫓아가는 뱁새와 비슷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을지로 구석구석에 숨겨진 술집을 발견하고 찾아다니는 이들이 힙스터였다면, 그곳이 입소문을 탄 후 뒤늦게 을지로의 힙을 만끽하려는 이들이 뱁스터이다. 진짜배기 힙스터들은 이미 사람들로 번잡해진 을지로를 떠나 다른 곳을 배회하고 있을 터이다.


* 선우정아의 노래, <뱁새>의 가사 중 일부분이다. 반드시 그녀의 라이브 영상을 찾아 감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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