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론병 확진 받던 날. 나는 괜찮은 척했지만 안 괜찮았다. 억울했다. 아닐 거라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을 것이고, 직장 생활도 순탄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정신은 온전치 않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내기 위해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내 인생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5500일 가까이 나는 나를 간호했다. 간호사인 내가 환자의 나에게 말을 건넨다. "약 드실 시간입니다. 식사는 얼마나 하셨나요? 통증은 줄었나요? 혈변은 없었나요?" 매일 나는 나에게 묻고 답한다. 이렇게 치열하게 보살피지만 가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란 현실을 느낄 때면 순간 좌절하게 된다.
살기 위해 종합병원 근무를 포기했고, 흰죽은 냄새만 맡아도 질릴 정도로 먹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날엔 지독히도 슬펐다. 하필이면 왜 나일까?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내가 난치병 환자여야 할까? 단단하게 뭉쳐버린 억울한 감정을 산산조각 낼 길이 없어 매일 울다 자다 반복했다.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그날의 난 미쳐버릴 것 같았는데 지금의 난 가끔 덤덤하거나 웃기도 한다.
억울한 시간을 건너 죽음과 조금 멀어졌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피곤함 보다 '오늘도 살았다'라는 안도감과 함께 미소가 지어진다. 밤사이 응급실에 가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와 통증에 잠이 깨지 않았음을 감사한다. 숨을 쉬고, 웃고, 이야기 나누고, 그대들과 꽃 한 송이 보는 세상. 어쩜 이리도 행복한지.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나의 그대들이 나와 같은 고통으로 힘들어하지 않음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 난치병은 나 하나로 족하다. 그대들이 건강하여 나를 대신해 딸기나 케이크를 먹고, 소고기도 구워 먹으며 배부른 모습이 너무나도 감사하다. 언제 어디서든 그대들이 힘찬 삶을 살길 바란다. 그때까지 나는 잘 견디며 치료제가 나오는 날 딸기 한 상자 사 먹겠노라.
아픈 건 나 하나면 충분하다. 나는 고통에 무뎌져 견디기를 잘한다. 때론 힘들고 슬프지만 그래도 괜찮다.
다른 건 바라는 게 없다. 오직 간절하게 그대들이 건강하길 바란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안녕하길. 그대들의 삶에 미소가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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