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뉴저지에 있는 친구를 방문했을 때다. 아내가 미국 간 김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둘째 처남을 꼭 보고 오라고 해서, 친구 차로 같이 갔다. 저녁 약속 1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막상 처남 집 근처에서 30여 분간이나 계속 맴돌았다. 당시는 셀폰도 없었고 내비게이션도 없어 달랑 지도 하나 들고 길을 찾던 시절이다.
해도 지고 주택가여서 주변에 어디 물어볼 곳도 없어, 조금 큰길로 다시 나와 밝은 곳을 찾다가 주유소를 발견했다. 그런데 친구가 갑자기 차를 멈추더니, 문을 모두 잠그고 창문을 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만 연다. 친구는 “필라델피아는 흑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어서 조심해야 한다”며 천천히 차를 몰았다. 마침, 몇 사람이 모여 있는데 어두웠지만, 딱 봐도 불량기가 있는 흑인 청소년들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필라델피아 북부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집 값이 싸서 흑인이나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긴장도 되고 무섭기도 해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주소를 말하며 길을 물었더니, “길을 알려 줄 테니 돈을 내라”라고 한다. 타지에서 온 동양인이 길을 물으니, 마침 재미거리가 생긴 것이다. 겁먹은 친구는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차를 빼려 하는데 이 광경을 보던 패거리들이 우리 쪽으로 슬슬 다가오네? ‘에구!’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저렇게 장난처럼 하다가 농담이 진담이 되는 경우가 많아”. 그 뒤, 필라델피아 하면 그때 일이 생각난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를 휩쓸던 1940년만 해도 미국 내 인종 차별이 심해 흑인 배우들은 시상식에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주인공 클라크 게이블이 "그렇다면 나도 시상식에 가지 않겠다"라고 고집해 다들 참석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하녀 역을 맡았던 해티 맥대니얼은 흑인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시상식장에서 백인 배우들과 떨어져서 별실에 혼자 있어야 했다.
또 다른 기억은 노예제를 다룬 미니 시리즈 <뿌리(ROOTS, 1977)>다. 쿤타 킨 테는 북을 만들려고 마을 외곽에서 나무를 찾다가 노예 사냥꾼에게 붙잡힌다. 아프리카를 떠난 배는 미 대륙으로 향한다. 흑인들은 돼지 우리나 다름없는 선 저에서 3개월을 지내는 동안 선상 반란을 일으키지만 제압당한다. 메릴랜드 주의 아나폴리스에 도착한 뒤 쿤타 킨 테는 노예로 팔린다. 쿤타 킨 테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도망치려고 여러 번 시도하다가 실패한다. 그는 농장주 동생에게 다시 팔린 뒤 여성 노예인 벨과 결혼한다.
두 사람에게서 태어난 딸은 10대 후반에 노스캐롤라이나에 팔려 가서 농장주에게 성폭행당하고 아들 조지를 낳는다. 조지는 1820년대에 영국으로 팔려 갔다가 자유인으로 미국에 돌아온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흑인, 알렉스 헤일리는 이들이 자기의 조상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지난 5월 미니애폴리스에서 있었던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죽은 흑인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보면서 그동안의 미국 사회 내 인종 차별과 소득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까지 보았던 영화와 드라마의 속의 흑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다른 시각이나 의미로 재해석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