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살면서 한글 가사로 된 K-pop이 세계 젊은이들에게 불려지는 것을 보면 기쁨을 넘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도대체 K-pop은 어떻게 세계적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인가, 이처럼 수준 높은 대중음악을 만들어 낸 문화의 저력은 무엇인가? 여러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나는 1959년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한 ‘김시스터즈’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시스터즈’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김해송을 말해야 한다.
1935년, 당시 24세였던 김해송은 이난영, 신일선, 고복수 등 오케레코드 전속가수들과 함께 무대 위에 오른다. 그 후 김해송은 노래뿐만이 아니라 작곡도 직접 맡았다. <우리들은 젊은이>, <청춘은 물결인가>, <청춘 해협>, <청춘 쌍곡선> 등을 작곡하고 노래도 불렀다.
1937년, 평양 출신 가수 장세정이 불러 크게 히트를 친 <연락선은 떠난다>는 김해송이 작곡한 노래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식민지 백성들의 처지는 그야말로 가련, 그 자체였다. 그저 시키는 대로 이리저리 휘몰리고 우르르 내쫓기면서 중심을 잃은 조각배처럼 위태로운 삶을 살았다. 한숨과 탄식이 끝없던 시절이었다. 이 노래는 민족의 가슴속 억울함과 답답함을 쓸어내리며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1938년 김해송은 가수 이난영과 결혼한다. 둘은 수많은 음악 작업을 같이 한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김해송은 KPK악단을 조직하고 작곡한 <울어라 문풍지>를 이난영에게 부르게 해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해방 직후 KPK악단은 미 8군 클럽 무대에서 서양 노래뿐만이 아니라, 우리 민요를 재즈풍으로 편곡한 곡들을 주로 연주한다. 김해송은 쇼와 뮤지컬도 직접 연출했는데 이난영, 장세정, 윤부길(윤복희의 아버지) 등 당대 스타를 비롯해 자신의 딸들과 조카를 출연시킨다. 당시 언론은 김해송을 ‘천재 예능인’이라 불렀다.
김해송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음악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가 “하나, 둘, 셋”을 외치면 자매는 돌림 노래를 부르거나 화음을 넣어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누군가가 틀리거나 하면 김해송은 매를 들기도 했다. 그는 주위에 “돈은 많지 않지만, 얘들이 내 재산입니다”라고 소개할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렇지만 너무 엄격한 음악 교육 방법을 싫어한 이난영이 ‘보따리 싸서 나간다’고 부부 싸움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엄격함이 ‘김시스터즈’가 미국으로 진출하는 자양분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6.25 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김해송은 북으로 끌려가 영영 소식을 알 수 없게 된다. 1997년 북에서 만든 자료 <민족 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에 의하면 ‘납북 후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결핵이 발병하고, 또 폭격으로 심한 부상까지 입어 원산으로 후송되어 병원 치료 중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전쟁이 끝나자 김해송은 차츰 잊어졌다. 그래서 그의 이름보다는 가수 이난영의 남편으로 더 남아있다. 어린아이들과 남게 된 이난영은 대중 가수로 사랑을 받았지만, 경제적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생계를 위해 어린 딸들을 가수로 키운다. <저고리 시스터즈> 출신인 이난영은 딸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이 먼저 영어 가사를 외웠고 춤도 직접 지도했다. ‘김시스터즈’는 <Candy and Cake>와 <Ole Buttermilk Sky> 팝송 두 곡을 뜻도 모른 채 달달 외워 1953년 미 8군 무대에서 ‘김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데뷔한다. 당시 나이 10세, 11세, 12세였던 세 자매의 미군 맞춤 공연은 이내 소문이 난다.
“미국에 가면 충분히 유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에이전트를 소개해주겠다”는 얘기를 미군들로부터 수도 없이 듣게 된다. 그러다 미국의 공연 기획자 톰볼(Tom Ball)로부터 “일본에 있으니 한국에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렇게 한국에서 오디션을 봤고 석 달 계약을 제안했다. 1959년, ‘김시스터즈’는 미국에 진출한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한 아시아 최초의 걸그룹 ‘김시스터즈’는 도착한 지 8개월 만인 1951년 9월에 <에드 설리번 쇼>에 첫 출연한다. 미국 <CBS>의 인기 버라이어티쇼였던 <에드 설리번 쇼>는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비치 보이스, 롤링 스톤스 등 당대 최고 뮤지션들의 쇼케이스 장이었다. <에드 설리번 쇼>의 첫 출연 이후 아시아에서 온 세 자매에 대한 관심은 미국 전역으로 번졌다. 1960년 2월엔 미국의 유명 시사 화보 잡지 <LIFE>에 ‘김시스터즈’에 관한 특집 기사가 길게 실린다.
‘아시아의 마녀들’로 불린 ‘김시스터즈’는 <Charlie Brown>, <Try to Remember> 등 재즈와 팝, 우리 민요를 리메이크해 선보였다. 능란한 악기 연주, 아름다운 화성, 타고난 리듬감, 귀여움과 섹시함을 강조한 퍼포먼스는 단번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려서부터 듣고 본 것이 음악이고 무대였기에 이들은 남들보다 빨리 악기를 익혔다. 기타, 드럼, 피아노는 물론 가야금, 장구, 트롬본, 색소폰, 클라리넷, 백파이프 등 수많은 악기를 익혀 단기간에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1965년에는 어머니 이난영이 세상을 떠났고, 이후 멤버들은 결혼을 하고 1973년엔 공식적으로 그룹이 해체된다. 세 멤버 중, 숙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살고 있고, 애자는 1987년에 암으로 죽고, 민자는 헝가리언 남편을 따라 부다페스트에서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