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고국 여행을 하고 있다. 마침, 미국에 사는 친구 부부가 한국에 와서 함께 경주와 포항, 부산, 여수, 순천, 목포 등을 2주간 다녀왔다. 이 친구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초등학교, 성당, 과외공부를 같이한 불알친구다.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혼자서 세인트루이스(St. Louis)라는 중부 도시로 대학을 간 후, 그곳에서 결혼해 정착하며 이때까지 살고 있다. 1970년대에는 그곳에 한인이라고는 200여 명뿐이고, 미국 여성과 결혼해서 “한국말을 쓸 일이 거의 없는 생활을 거의 50여 년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한국말도 어눌하고, “한국 친구라고는 너뿐이야”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다가 몇 개월 전에 전화 통화하는데, 내가 “한국에 간다”고 하니까, “네가 한국에 갔을 때, 함께 여행을 하고 싶다”며 휴가를 내고 아내와 함께 쫓아왔다.
우리가 다녀온 여행지를 돌이켜 보면 주로 바닷가를 다녔다. 경주의 문무대왕 수중릉, 포항의 구룡포 해수욕장과 호미곶, 부산 해운대와 태종대, 그리고 송정해수욕장. 여수의 돌산공원과 오동도. 목포의 갓바위, 유달산 등이다. 여행을 함께 한 친구와 내가 살고 있는 토론토는 북미주의 내륙에 있어 바닷가를 보려면 차로 10시간 정도나 가야 한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 볼 수 없는 바다를 질리도록(?) 볼 수 있었다.
많은 해외 교포들이 고국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듯하다. 어린 시절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았던 기억은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게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면 부모님이 흐뭇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어 안전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면 바다가 보이는 상황 말이다. 모래를 어떻게 가지고 놀아야 하는지도 필요 없었다. 혼자 탑을 쌓아도 재미있고 친구와 같이 쌓아도 즐거웠다. 근사한 모래성을 쌓아도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노는 동안, 놀이에 몰두하는 동안 행복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은 그때 놀았던 ‘모래성’을 찾아본 것 같았다.
내게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졌을 때, 나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 혼자 노는 사람인가,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의 궁금증이 바쁜 여정 속에서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친구는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사여서 2주의 휴가를 마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아내와 나는 서울에서 2박 한 후, 다시 양양과 설악산, 오대산 등을 다녀왔다. 서울에 있으면서 외국인들의 필수 관광 코스인, 광장시장과 창덕궁 후원, 종로성당, 인사동 등을 다리가 아플 정도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글 쓰기는 아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마감 효과(deadline effect)’라는 현상이 있는데 마감이 다가오면 갑자기 효율이 늘어나고 결과가 좋아지는 거다. 시간이라는 자원이 다 떨어져 간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집중력이 높아지는 것인데, “당분간 글 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으니 조급함도 없고 머리 쓰는 일에 에너지를 쓰기 싫어진 거다.
그동안 강행군을 해서 ‘당분간은 딸이 살고 있는 동탄 신도시에서 얌전히 지내야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자고 나면 해야 할 일과 약속이 생긴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는 ‘무엇을 먹을까, 볼까, 어디서 잘까?’등 재미있게 놀 생각만 하면 됐는데, ‘이렇게 놀기만 해도 되는 건가’하며 은근히 걱정이 든다. 벌써 한 달 여가 지났고, 이제 고국에서 해야 할 일을 챙겨야 한다. 은행 업무, 국적 회복 신청, 가까운 친지들에게도 안부 전하는 일 등 침대에 누우면 해야 할 일들이 새록새록 쌓인다. 3달 여씩이나 ‘한국에 있으면서 인사도 안 하고 가면 섭섭한 마음이 얼마나 크겠나?’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딸아이가 결혼을 할 때도 와 주신 분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했으니, 이번에는 전화라도 해 볼 참이다.
이곳에서 행복한 순간은 뭐니 뭐니 해도 값싸고 질 좋은 음식을 먹을 때디. 평균 1만 원 정도면 내가 즐겨 먹었던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다. 물론 값나가는 음식들도 있지만, 직장 생활을 하며 점심때 어울려 먹었던 백반, 찌개류, 칼국수, 만두, 빈대떡, 홍어회, 설렁탕, 해장국, 순댓국, 산채 비빔밥 등을 값싸게 즐길 수 있다. 특히 해산물들이 신선하고 다양해서 좋다. 거기다가 소주와 막걸리는 왜 이리 싼가? 토론토에서는 2만 원 정도 하는 소주가 4~5천 원이다. 그런데 음식 문화도 진화해서인지, 모르는 메뉴들도 꽤 있다. 양식인지, 한식인지 모를 음식들 말이다. 그런 음식도 한번 먹어 보고 싶지만, 먹고 싶은 음식이 많은데 그런 것까지 먹어 볼 여유가 없는 것이 아쉽다.
이곳 생활하며 불편(?)한 점이 있다면 마스크 착용이다. 실내는 물론이고 야외에서도 마스크 착용은 의무다. 토론토에서는 슈퍼마켓 정도에서나 마스크 착용을 하면 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숲 속의 산사에서도 마스크를 해야 할 정도다. 아침마다 손녀의 초등학교를 데려다주는데, 딸로부터 “아빠, 마스크 챙겼어?”를 매일 듣는다. 왜, 이렇게 한국인은 마스크에 집착할까? 물론 정부가 방역 지침을 내려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렇게 ‘불편한 지침’을 공손히 따르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의 흥미로운 이론이다. “동양인과 서양인은 타인의 얼굴을 보며 감정을 읽는 방식이 다르다”라고 한다. 서양 사람은 주로 타인의 입을 보며 그 사람의 감정을 읽는 반면에 동양 사람들은 입을 보지 않고 주로 눈을 보며 그 사람의 감정을 읽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눈과 입이 자신의 감정을 싣거나 남의 감정을 읽는 데 굉장히 중요한 부위인 건 맞는데, 중요한 정도가 동서양 사람들에게 서로 다르다는 거다. 동양 사람들에겐 눈의 형상이 중요하고, 서양 사람에겐 입이 중요하다는 거다.
그래서 “서양인은 입을 가리는 마스크가 불편한 거고, 동양인은 마스크를 해도 눈이 보이니, 불편하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마스크 착용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거고, 동양인은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적다고 말한다.
불편한 점이 어디 마스크뿐 이겠나? 어머니가 떠난 고국은 벌써 남의 나라가 되어 버렸다. 한국 국적을 회복하려고 벌써 한 달을 기다리고 있는데, <외국인 출입국 사무소>의 방문 예약일은 아직 20여 일이나 남아 있다. 그동안 코비드로 해외 교포들이 못 들어오다가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업무 처리가 늦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방문 예약을 하는데 45일 여나 걸리는 건, 좀 심한 것 같다.
당분간 이곳에 있어야 하는데 슬슬 겁 같은 것이 난다. “그때가 참 좋았지”하면서 이렇게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내도 되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