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이었다. 아랫집 누수로 머리도 시끄럽고 누수 찾는다고 작은방이며 주방까지 뒤엎어 어지러운 와중에 뭐라도 해야 마음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바닥 뚫느라 싱크대 하부장이며 작은 방, 주방 바닥, 식기장에도 시멘트 가루가 뿌옇다. 대강 바닥 청소는 했으나 아직 공사가 더 남아 있다. 추워서 창문도 오래 열어 놓을 수가 없다. 대충 닦고 밥도 못해 먹는 상황이 거의 준난민 수준이다. 다행히 난방은 된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를 되뇌어 보지만 마음이 펴지지 않는다. 이대로 있다간 2023년이 암울하게 기억될 것 같다. 불현듯 이 상황에 생뚱맞게도 잘 안 쓰는 무쇠 주물 냄비를 처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근'. 다른 때 같았으면 좀 더 생각해 본 후에 내놓거나, 사진 찍고 제품설명란에 써서 올리기 귀찮다고 미루거나, 거래하는 것도 신경 쓰여서 그냥 다음에 하자 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뒤숭숭한 집안꼴은 이런저런 핑계를 한순간에 제압해 버렸다. 손은 바로 식기장 깊숙이 들어가 있던 무쇠 전골냄비로 향했고 나오기 싫다는 애를 낑낑대며 조심스레 꺼냈다. 곧이어 손 안의 개인비서를 들고 요리조리 사진을 찍어댔다. 이후 망설임 없이 바로 '당근'에 사진을 올리고 설명도 거리낌 없이 써 내려갔다. 사진 찍고 설명을 쓰는 동안 머릿속으로 적당한 가격선을 생각했다. 나눔이 아니니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괜찮은 가격을 빠르게 정한 후 가격도 적어 넣었다. '작성 완료'
공사가 빨리 마무리 됐으면 하는 마음은 물건을 빨리 처분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졌고 3년간 함께한 내 무쇠냄비는 이렇게 속전속결 당근행을 확정 지었다. 사실 무거워서 몇 번 쓰지는 않았지만 여자라면 다 안다. 예쁜 옷이나 액세서리만큼 결혼 후 점차 살림에 눈이 뜨이면 주방에서 쓰는 조리도구나 냄비, 프라이팬, 그릇 모으기에 더 열심히 된다는 것을. 물론 사람마다 성격과 취향이 다르긴 하지만 절대 아닐 것 같은 내 삶에도 그런 시기가 오긴 하더라. 여기에는 집밥시대를 연 코로나도 한몫했다.
그러나 그 또한 지나간다고 살림 연차만큼이나 나이 들어가는 몸뚱이와 손목은 어쩌지 못해 결국 무거운 주방살림들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점점 쓰기 편하고 가벼운 것만 찾게 되는 내 모습을 보며 잘 안 쓰는 무쇠 주물냄비들은 처분해야지 하던 차였다. 차분하게 한 해를 마감해야 하는 2023년 말, 갑작스레 벌어진 누수공사로 기분도 꿀꿀하고 주방 바닥은 파헤쳐져 밥도 제대로 해 먹지 못하는 판국은 급기야 나를 '당근'으로 인도하였다. 사겠다는 사람이 빨리 안 나타나도 괜찮았다. 팔겠다고 한 행위 자체 만으로도 벌써 꾸리꾸리하고 부글부글한 마음과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아니 벗어난 것만큼이나 홀가분하고 만족스러웠으니까.
"당근"
한 시간 남짓 되었을까. 처음엔 경망스럽다고 여겼던 이 소리도 이젠 익숙하다. 무쇠냄비를 사겠다고 한다. 내일 오전 10시 30분으로 약속 시간을 잡았다. 누수 원인을 찾았을 때보다 더 후련했다. 다음날 아침, 아이 등교 후 입양 될 무쇠 주물냄비를 싸기 위해 일명 뾱뾱이를 꺼냈다. 택배가 올 때마다 괜찮은 것들로 모아 놓았었는데 이럴 때 아주 유용한 녀석이다. 다시 한번 뚜껑이랑 냄비의 안팎을 살펴보던 중 냄비 바깥쪽 궁둥이 한쪽 부분에서 미세한 스크래치를 발견했다. 어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흠. '어라, 이 얘기는 안 했는데. 어제 좀 더 자세히 살펴볼걸.' 언제 어디에서 긁혔을까나. 이 정도는 요리하는 데에 별 상관이 없을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냥 보내기 찝찝하다. 서둘러 구매자에게 사진을 찍어서 챗을 보냈다.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하고 구매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과 함께.
"괜찮아요."
약속시간에 보자고 한다. 구매자가 취소할 거란 생각으로 냄비를 한쪽 구석에 밀어 넣고 다시 제품설명을 수정하고 사진을 첨부하려 했는데 괜찮다고 하니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당근' 거래를 하다 보면 별것 아닌 것에도 괜한 트집을 잡는 사람도 있고, 떠보는 말만 하고 답도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약속 시간을 여러 번 바꾸는 사람들도 있다. 돈 벌려고 하는 거래가 아닌데,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고 멀쩡한 것들이라 중고인 점을 감안한 가격으로 팔고 사고 좋은 마음으로 나눔을 하는데 어떤 이들은 내가 생각하는 당근의 의미를 바래게 해서 피곤할 때가 있다. 진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내가 당근거래를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안 되겠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야겠다. 크기가 작아 활용도가 떨어져 처분하려고 했던 16cm짜리 빨간색 작은 무쇠 주물 프라이팬을 같이 입양 보내기로 하고 챗을 보냈다. 바깥쪽 바닥 코팅이 조금 벗겨지긴 했지만 쓰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쓰시겠냐고. 남편이 거친 수세미로 문지르는 바람에 나한테 설거지해 주고 칭찬받으려다 되레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한바탕 욕세례를 받았던 애증의 프라이팬.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밀 때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데 반짝반짝 윤이 나는 빨간색 궁둥이 한쪽을 얼마나 박박 밀었으면 까만 속살이 보인단 말인가. 다행히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 옥에 티처럼 한동안 프라이팬 뒤집어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라 일부러 꺼내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쨍하게 예쁘고 귀여워서 기분 전환하고 싶을 때 꺼내 쓰던 프라이팬이었다. 반면 크기가 작아서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었다. 마음속으로 쓴다, 안 쓴다를 계속 저울질하게 했던 요놈도 이제는 미련 없이 보낼 수 있는 주인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구매자로부터 곧바로 정말 감사하다는 답을 받고 다시 마음 가볍게 포장을 하기 시작했다. '너희들 주인이 마음씨가 참 좋은 분이라 내가 안심이 된다. 가서 열심히 잘 살아라.' 무쇠 주물 냄비와 프라이팬은 무게가 꽤나 나갔다. 단단히 포장을 하고 신문지로 둘둘 말아 두껍고 튼튼한 비닐봉지 두장에 넣고 입양 보낼 준비를 마쳤다.
"당근"
약속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아파트 동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차로 이동하는데 날씨가 너무 추우니 우리 아파트 동 앞에 도착해 챗을 하면 그때 내려오라는 거였다. 원래 약속 장소는 아파트 정문이었다. 엄동설한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계속된 영하의 날씨로 나가는 것도 큰맘 먹고 나가야 할 만큼 추웠고, 전날 내린 눈은 녹을 생각도 안 하고 꽁꽁 얼어붙어 있어서 도로 대부분이 빙판길이었다. 사실 아침에서야 추운 날씨를 인지하고 왜 지금 '당근'을 한 걸까 잠시 후회를 하긴 했다. 후회를 단번에 없애 준 상대방을 향한 망극한 배려심은 신기하게도 매섭게 얼어붙은 바깥 풍경을 미술관에 걸린 유명 화가의 작품처럼 보이게 해 주었다. 비록 현관문을 열고 나서니 현실은 헉 소리 나게 추웠지만 훌륭한 작품을 감상하게 해 준 구매자의 배려심에 무거운 무쇠덩어리는 꽤 들만한 무게로 변해 있었다.
구매자는 나를 단번에 알아보고 차에서 내렸다. 젊은 새댁으로 보였다. 해사하고 예뻤다. 서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헤어지려는데 구매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귤'이었다.
"작고 못 생겼지만 맛은 정말 좋아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다른 쪽 주머니에서 또 무언가를 꺼낸다. 이번에도 '귤'이다.
"좀 더 갖고 왔어야 했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챙겨 오지 못해서 죄송해요. 작고 못생겼지만 정말 달고 맛있으니 드셔보세요."
양쪽 주머니에서 못난이라 칭하는 귤 하나씩을 꺼내서 건네는 모습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추운 겨울날 전해지는 그 마음이 너무 따스하고 에뻤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한 개는 먹고 나머지 한 개는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집으로 들어온 후 식탁 위에 귤 두 개를 내려놓고 한참을 바라봤다. 작지만 전혀 작지 않았고 못난이라 했지만 동글동글 귀여웠다. 조그만 귤 두 개가 이렇게 기분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다니. 힘들었던 12월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얼굴과 손은 시렸지만 가슴은 설명하기 힘든 따뜻한 무언가로 꽉 채워지고 있었다.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는 활짝 핀 미소로 나이 들고 건조한 눈가 주름과 팔자 주름이 더 선명해지고 있음을 거울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생기는 주름이라면 기꺼이 받아줄 수 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요즘엔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공격을 받거나 해를 입기도 한다. 내 기분이 별로라서 네가 그냥 싫어서 등 정당한 이유가 없다. 사람을 만나고 성격과 뜻이 안 맞아 헤어지는 것도 무서운 세상이다. 상대방의 입장 따위는 중요치 않다. 오로지 나만 있고, 나만 중요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럼 내가 먼저 이해하고 배려하자 했을 때는 어떤가. 오지랖 떠는 사람, 실속 없는 사람, 더 나아가 바보로 취급받기도 한다. 조금도 손해 보려 하지 않기에 내 것은 절대 내주지 않고 남의 것은 더 가져와야 잘 사는 거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배려받는 사람들도 당연한 것이라 여겨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만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귤 두 개에, 누수 공사로 집 나간 버석버석한 마음이 온기로 가득 찼던 그날, 알았다. 아주 작은 이해와 배려와 상대방을 챙기는 마음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시작한다는 것을. 비록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서로 예의를 지키고 이해하는 마음만 있으면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일지언정 짧은 만남에도 많은 감정들이 오가고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냄비 구매자는 마지막까지 챗으로 잘 쓰겠다며 정말 감사하다는 글과 함께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고 행복한 하루 보내라는 인사를 남겼다. 귤 두 개에 이미 마음을 뺏긴 나로서는 남들이 하는 흔한 인사말로 들리지 않았다. 귤 하나를 까먹고 너무 맛있어서 감사의 답을 보내고 다시 대화가 이어져 몇 마디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대화를 마무리했다. 하나 남은 귤을 다 먹기 아까워 나무 그릇에 담았다. 선물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오늘 당근 했는데 귤 생겼다."
2023년 12월 말, 그렇게 냄비와 프라이팬은 심성 고운 새 주인한테 갔고, 나는 정말 오랜만에 보기 드물게 진하고 단 진심으로 맛있는 귤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