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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두치 Oct 29. 2021

실패는 쓰다 그래서 피하고 싶다

#10. 진정한 포기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



굳이 실패를 해야 할까?


드로잉을 하면서 수십 번 묻게 되는 질문이었다.

내게 드로잉은 마치 도망갈 곳이 없는 거대한 심판장처럼 느껴졌다.






나는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기 위해 class 101 콰야의 오일파스텔 수업을 들었다.

콰야는 '지우개는 가급적 쓰지 마세요. 실패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껏 그려'라고 했다.


그런데 어디 그게 쉬운가.

오일파스텔을 하나 들어 올리자, 빳빳하고 하얀 캔버스지를 조금이라도 흠집 내고 싶지 않은, 그런 이상한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림은 많이 그려야 늘게 되는 불문율이 있는 건데, 한 장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쏟았던 시간과 체력, 재료들이 너무나 아깝게 느껴졌고 그냥 버려지는 것 같았다.

더욱이 이미 실패한 그림은 더 이상 그림이 아니라 한낮 종이짝, 쓰레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무언가 그로테크스함까지 느껴지는 드로잉 의식을 준비하며.jpg



누군가에게는 가치 있는 예술이 누군가에겐 전혀 아닐 수 있다.
예술을 제외한 어떤 것도
이렇게 극단적인 차이가 있는 평이 나오기 어려운 것 같다.
그것이 예술의 매력이다.
- 팬층 만들기에 성공한 덕질들의 공통점, 삼천 원 김민식 대표



역사와 예술이 해석에 따라 다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처럼 실패 또한 과연 그럴까.


실패작에 쏟은 시간과 에너지, 여러 유무형의 자원들이 결코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유튜브로 즐겨보던 드로잉 작가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냥 그리세요.
내가 별로라고 생각했던 것을 오히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해 주기도 하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더라고요.
그러니 그냥 상관없이 계속 그리면 됩니다. -이연


결국 실패냐 아니냐를 가르는 것은 나의 기준을 얼마나 허물어뜨릴 수 있느냐 여부에 달린 것이지.


드로잉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보는 법을 배우는 거라는 말이 생각난다. 내가 어떻게 그 장면을 보았고, 표현하고 싶은지를 구체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던 것 아닐까


나는  머릿속의 이미지가 드로잉에 그대로 구현이 되지 않는  같을  실패감을 많이 느꼈다. 내가 피사체와의 관계를 맺으며 만들어졌던  순간의 느낌을 드로잉으로 충분히 담아내고 싶다는 열망이 좌절되는  싫었다. 그런데 돌아보면  머릿속의 이미지가 모호하기도 했다. 나는 느낌으로만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지, '이미지'로서의 기억은 지우개로 지워놓은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어쩌면 제대로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살아왔다는 생각까지 든다.


나는 색이나 비율 등 전체적인 드로잉의 조화,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높은 편이다.

그래서 작업을 완성할 때마다 대체로 실패감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깨는 것이 어쩌면 실패감도 줄이고 지속적인 드로잉을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음.. 내 작품이 별로인 것 같다'라고 무조건 생각하기보다, 내가 만든 작품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는 노력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작품과 쓰레기의 차이는 해석인가 왜곡인가를 가르는 기준에 있는 것인가.

나는 지금 실패 경험을 왜곡하고 있는 것인가. 실패에 대한 해석을 확장하고 있는 것인가.


언젠가는 써먹겠다 가슴속에 묻어뒀던 짤 지금 꺼낼때다.jpg



내 드로잉 실력은 회차가 거듭돼도 나아지지 않았다.

성미가 급한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실패를 견뎌낼 수 있을까.

실패의 경험이 내게 상처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적어도 실패에 아파하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나는 실패의 의미와 경험을 끊임없이 확장하고자 노력했다.




그래도 여전히 실패는 싫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여전히 온몸이 실패의 경험을 거부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쯤에서 밥 로스의 짤을 꺼내보자.jpg



여러분의 삶과 이 세상을 사랑하세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앉아서 그리기 시작하시면 또, 여러분의 자신과 이 세상이 좋다고 느껴지신다면 여러분의 그림에 다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미 인생을 정말로 즐기고 계시다면 그러시다면, 여러분은 잘 해내실 겁니다. 전 제 인생의 절반을.. 남을 위한 삶을 살았거든요. 그림 그리실 때는 행복하셔야 합니다.
-밥 로스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즐기는 마음이 부족했던 걸까.

밥로스의 이야기를 다시 찾아보고나니 ‘, ,,, 그림을 진짜 ( 어떤 구속도 없이 마음껏) 그려보고 싶다'라는 욕망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실 어떤 기준과 상한선을 예측한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한다면 그 어떤 것도 재미는 없어진다.

돌이켜보면 삶 자체가 그렇다.

그러니 드로잉은 당연히 더~~~ 그렇다.  




그대는 그대가 하여야 할 일을 하면 된다.
행위의 결과는 그대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기대를 품고,
그것을 목적으로 행위해서는 안 된다.
또한 행위를 피해서도 안 된다.
진정한 포기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다.

행위의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은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그 둘이 섞인 세 가지 열매를 번갈아 맛본다. 그러나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한 사람은 행위나 행위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초월적인 자유를 누린다.
-바가바드 기타




나는 드로잉을 통해 자유를 배우고 싶다. 그래서 실패에도 불구하고 드로잉을 포기하지 않고 싶다.

나는 드로잉을 하며 결과에 대한 기대를 품었고 그것을 목적으로 드로잉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결과만 바라보게 됐을 때 나는 그 결과에 더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내가 드로잉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새와 만났던 경이로운 순간을 결과로써 아름답게 만들기 원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 순간의 경험을 잘 기록하고 반추하는 과정에서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냥 좋아하는 것을 찾고 싶었다. 그냥 재밌게 그림 그리고 싶었다. 그런 측면에서 그동안의 내 실패감은 나도 모르게 내 몸에 체득된 결과 중심적인 인의 발현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원하는 목표, 예측하는 결과를 다 이룬다는 것이야 말로 현실에 없는 유토피아다. 내가 예측한 결과가 미끄러짐으로써,  예측 불허한 삶이기 때문에, 예고편이 없기 때문에, 예고편이 있더라도 그대로 삶은 흘러가지지 않기 때문에 즉흥적인 즐거움과 살아 있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실패는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드로잉은 끊임없이 내 기준을 무너뜨려야 하는 아픈 도전이었다. 그래서 내가 인생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하는 과정일 거라는 예감이 든다. 바가바드기타의 크리슈나가 "진정한 포기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나도 드로잉을 통해 자유를 만끽하고 드로잉을 좋아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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