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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두치 Oct 29. 2021

모든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흙처럼

이미 완벽한 삶을 위하여


몇 년 전의 일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목적지도 아닌 정차역에서 다급히 내려 의자에 몸을 쓰러지듯 기대고선 온 힘을 다해 숨을 쉬었다.


그땐 몰랐다. 공황장애라는 질병이 내게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몸이 어딘가 좋지 않은 것이겠거니 하며 한의원에 가서 명치에 침을 맞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땐 일도, 삶도 차올라 벅찼던 시기였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켜켜이 쌓인 불안이 일상을 침투해 삶을 무겁게 짓누르던 30대 초반의 일이다.




그럴 때면 나는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땐 무작정 치앙마이로 갔다. 치앙마이에 두 달을 거주하며 도예를 배웠다. 처음엔 치앙마이에서 도예를 배울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어쩌다가 slow hands studio라는 도예 공방에 가게 됐고 그 뒤로 매일 5시간 가까이 작업을 할 만큼 그땐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게 좋았다. 특히 손에 닿는 흙의 촉감이 머리의 많은 생각들을 앗아가 주는 것 같았다. 흙을 빚으며 그곳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흙은 마법 같아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독을 빼주지



도예를 가르쳐줬던 팅의 말이다. 몇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따금 팅이 해준 말이 생각난다.


맞다 흙은 독을 빼준다. 손 끝으로 흙을 빚어내며 실패작은 없다 생각했다. 나와 사람들이 만든 모든 도예 작품들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즈음 집으로 돌아갈 때면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곤 했다. 치앙마이의 하늘은 유난히 빛났다.


그래,
아름답지 않은 하늘이 있었던가?


하늘을 보며 다시 묻게 됐다. 흙이 어떤 모습으로 변형되고 만져져도 아름다운 것처럼 그땐 하늘 또한 어떤 모습이든 다 그렇게 보였다. '치앙마이의 하늘은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 생각했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존재다. 나는 삶이 이미 완전하다는 사실에 대해 아직 다 받아들이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낮잠을 길게 자고 일어나는 날이면, 외로움과 슬픔의 감정이 공존하곤 했다. 그 슬픔과 불안의 감정을 피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마구 하다 보니 어느새 다시 점점 숨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이미 완성되어 있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무언가를 향해 달려갈 필요도 없고,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법상 스님

우연히 친구가 보내준 법상 스님의 글을 읽는다. 삶이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슬프다는 말에 법상스님은 “그래도 괜찮다. 그 우울하고 무기력한 것이 나쁘다는 분별을 가지고 있는 것이 더 그 감정을 증폭시킨다”는 이야기를 했다. 게으르면 게으른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그대로 그렇구나 봐주면 다 지나간다는 법상스님의 이야기에 먼지처럼 갈피를 못 잡고 붕붕 떠다니던 내 마음이 다시 중심을 잡고 가라앉는 것 같았다.





법상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미 완벽한 삶에 대한 은유는 도처에 널려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치앙마이에서의 하늘과 도예 작업이 그랬듯 지금 이곳에서는 내 눈앞의 고양이가 그렇다.




고양이 보리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낮잠을 잔다.


보리는 몸을 웅크린 채 낮잠이 들었다. 좁아터진 캣타워 위에 들어가 있다보니 삐죽 볼살이 튀어나왔다. 캣타워의 문 턱에 볼살을 오래 기대는 게 불편했는지 이내 몸을 고쳐 들고선 캣타워 모서리에 다시 몸을 구겨 넣는다. 한쪽 팔을 빼서 머리를 지탱해보기도 하고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돌리기도 한다. 햇살에 눈이 부셨는지 갑자기 앞발을 뻗어 눈을 가린다.


눈매를 가로지르는 짙은 줄무늬가 마치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눈을 연상시키는 것 같다. 그 눈매의 선이 너무 신기하고 절묘하고 아름다워서 보는 내내 미소가 든다.


생각해보면 보리는 하루에 절반 이상의 시간을 잔다. 잠을 잘 땐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땐 일어나 있을 뿐 그 어떤 번뇌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잠을 잘 수도 있고 안 잘 수도 있다. 보리는 이미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완전한 순간을, 그 순간 그대로 그만큼 살아내고 있었다. 이 단순하지만 몸으로 체화되지 않았던 삶의 진실을 함께 살아가는 고양이 보리를 보며 다시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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