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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츠 Daltz Apr 09. 2023

나의 대안, 인디뮤지션과 웹툰 작가.

안되면 그냥 지망생으로 살지 뭐. 세 개의 세계 속에서.

  이야기와 음악을 창작하는 작업을 수익으로 연결시켜 보자니 뻔한 직업과 뻔한 방법밖에는 떠오르 않았다. 뻔하게도, 이야기는 웹툰으로 만들어서 연재하고 음악은 디지털싱글로 발매하기로 했다.


  매주 한 화씩 웹툰을 그려 네이버 '도전만화' 코너에 올렸다. 보통 4,5편이 모이면 에피소드 하나가 완성되는 단편선이었다. 그렇게 단편 웹툰 하나를 완결낼 때마다는 그와 연결되는 내용의 음악을 만들어서 같은 제목의 음원을 디지털싱글로 발매했다. 음악과 이야기를 아우르는 콘셉트를 기획하고, 콘티를 짜고, 작사와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악기와 보컬을 녹음하고. 그러느라 나는 늘 스스로가 정해둔 마감시간에 쫓기며 지냈다.


  그 와중에 머리를 식혀야지 싶을 때면 취미 삼아서는 또 다른 작업을 했다. 영화 리뷰와 함께 그 o.s.t들을 커버한 영상을 블로그와 유튜브에 올리는 거였다. 그런 글을 쓰는 건 내겐 수다를 떠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아하는 소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즐거워졌다. 또 좋아하는 음악의 연주와 노래 연습을 하고 있자면 스트레스가 풀리곤 했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풀고 나면 창작의 고통도 다시 견뎌낼 만해졌다. 웹툰에 이어서 음악창작해 내는 작업은 위와 같이 '취미 삼아서'라는 감각으로는 이어갈 수 없다. 작업량부터가 그랬다. 또 결정적으로, 마감일이 정해져 있었다. 수익화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작업이기는 했지만 당장에 수입이 발생되는 것도 아닌데, 직업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에너지를 들여야 했다. 그래도 그런 스트레스에 비례하여 보람 역시 컸다. 그래서 나는 아주 부지런하게, 흑역사를 생성해 냈다.


  무작정 작곡하고 연주하고 노래한 음악들을 십만 원짜리 콘덴서 마이크로 녹음했다. 믹싱도 제대로 할 줄 몰라서는 각 트랙별로 볼륨이나 겨우 조절하는 수준이었다. 결국 음정도, 박자도, 편곡도, 음질도, 모조리 엉망진창인 음원이 만들어졌다. 그러면 나는 그 음원들을, 발매 후엔 절대로 다시 수거할 수 없는 디지털싱글로 쭉쭉 내버렸다.


  사실 나는 당시에도 내 작품들이 부끄러웠다. 래서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그냥 세상 속에 던져버 거. 어차피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어설픈 무엇 밖에는 만들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계속 만들어 낼 건데 어쩌라고! 하는 심정으로 일종의 객기를 부리고 있는 거였다.


  웹툰 역시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애초에 만화보다는 동화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내 그림체와 이야기에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취향이 묻어났다. 런데 규 콘텐츠가 아닌 '도전만화'에까지 찾아와 주는 만화 애호가 층에게 그런 그림과 이야기는 쉽게 어필되지 못했다. 때로는 반감까지도 샀다.


  그들의 논리 따르자면 '도전만화' 긴 시간을 들여 정성껏 실력을 갈고닦는 만화가 지망생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근본도 없는 그림과 이야기그 바닥에 난입했다 거였다. 맞는 말이다. 같은 페이지에 실려있는 다른 수많은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내 그림과 이야기는 굉장히 이질적이라는 것을 나도 알 수가 있었다. 그곳을 성역으로 여기는 이들 있다면 그 눈에는 내가 신성모독을 하이로 보였겠지.


  그래서 나는 로 웹툰작가로는 절대 데뷔할 수 없으리라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도 이런 시도를 안 해봤다면 알지 못했을 거다. 그 밖에도 사람들 앞에 내 작품을 노출하면서는 깨달을 수 있는 바가 많았다. 주기적으로 마감에 맞추어 작업을 완결 내는 연습을 해볼 수 있다는 도 좋았다. 그러니까 나의 발전을 위해서는 계속하여 작업물을 발표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했다. 그리고 누구나 자유롭게 작품을 올릴 수 있으면서 노출도까지 어느 정도 갖춘 다른 플랫폼을 나는 찾을 수 없었다.


  러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연재를 계속했다. 가끔씩 비난조의 댓글을 마주칠 때마다는 내가 지금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채로 걷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문득문득 체감하였지만. 그래도 신발이 있는 게 어디냐 싶어서 계속 걷다 보면, 그렇게 어색한 나의 발자국 누군가 좋아해 주기도 했다. '도전만화'에서 연재 중이던 나의 웹툰은 약 5개월 만에 '베스트도전만화'가 되었다.






  내가 올린 웹툰이 '도전만화'에서 '베스트도전만화'로 옮겨졌을 무렵. 이미 디지털 싱글로 발매하였거나 발매를 앞두고 완성해 둔 창작곡들곡 남짓되었다. 나는 그 음악들을 들고선 홍대 앞 클럽들을 전전하며 공연 시작했다. 보통은 간단하게 내 작업을 소개하며 자작곡들을 노래했다. 그리고 가끔은 노래와 연관된 웹툰의 내용을 영상으로 제작한 다음, 그 영상이 재생되는 타이밍에 맞춰서 음악과 이야기를 엮어 들려주는 구성으로도 공연을 했다. 마치 짧은 음악극과도 같은 그런 공연을 나는 가장 좋아했다. 하지만 영상과 대본을 또 별도로 만들자니 준비 시간이 무척이나 오래 걸으므로 자주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출연하는 것을 모르는 채로 공연장에 온 사람들에게는 웹툰을 홍보할 수 있었다. 드물게는 반대로 웹툰을 보고선 공연장에 찾아와 주는 도 있었다. 어쨌거나 관객은 대체로 한 자릿수였고 때로는 아예 없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연료를 전혀 받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지만 가끔씩원, 이만 원 정도를 벌기도 했다. 인당 오천 원 정도를 받는 관객 입장료를 공연장 사장님, 그리고 다른 출연자들과 나누어 갖는 것이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돈이 벌린다는 자체가 신기했다.


  한 달에 하나씩 음원을 발매하다 보니 음원 수익도 한 달에 만원 전후로 들어왔다. 정산서를 보면 대부분의 수익이 '벅스뮤직'의 인디음악 카테고리에서 발생되고 있었다. 그곳에 올라오는 신규앨범들을 매번 쭉 들어주는 리스너들이 있는 모양이었. 스트리밍으로 인해 발생한 매출다운로드로 인해 발생한 매출도 건별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정기권을 구매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를 다운로드했을 때의 정산금이 가장 컸다. 칠백 원 정도. 당시의 주식 중 하나였던 삼각김밥 수 있 돈이었다. 월 정산액인 만 원으로 삼각김밥에 컵라면까지 더해도 7,8끼는 먹을 수 있을 거였다. 누군가가 내 음악에 대하여 지불한 돈으로 도 먹을 수 있게 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지만 정작 그렇게 음악으로 번 돈으로는 아무것도 사 먹을 수가 없었다. 생활비로 써버리기 어쩐지 아까웠다. 래서 잘 모아두었다가 꼭 문화생활에만 썼다. 내가 계속해서 창작활동을 해나가는 조금이라도 공부가 될 것들만 즐기자는 게 나만의 규칙이었다. 그 돈으로 나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자라섬재즈페스티벌, 그랜드민트페스티벌  즐겼다. 때로는 전시회나 티켓값이 꽤 비싼 뮤지컬 보러 다니기도 했다.






  결국 학창 시절에 내 창작활동의 결과물을 본 적 있는 사람들이 예상했던 그대로, 나는 반쯤은 취미 같고 반쯤은 가수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애매하기 짝이 없는 정체성이었지만 나는 꽤 만족스러웠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내가 원하는 일에 쏟으면서 살는 삶이라니. 난생처음이었다. 나머지 시간들은 그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고 생각하면 별로 힘들 것도 없었다. 주거환경이 불안정하고 인간관계가 협소하여도 나는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창문도 화장실도 없이 한 평을 조금 넘는 방음부스에서 야간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는 대신, 나는 인디뮤지션 그리고 웹툰작가 '지망생'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창작활동을 수익으로 연결시킬 여지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얻지 못했을 정체성이었다. 나의 어설픈 시도로는 한 달에 겨우 일이 만원의 수익이 창출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덕분에 나는 당장의 돈보다도 훨씬 귀한 것들을 얻게 되었다. 처음으로 세상에 내 작업물들을 공개하게 된 거였으니까. 세상 속에서 나의 작업물들은 내 방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 누군가 함께 보고 듣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들은 비로소 생명을 얻은 양 생생해졌다. 그리 아름답지는 못하더라도, 비로소 하나의 세계가 탄생했다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혼자만의 작업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 무렵의 나는 세 개의 세계 속에서 살고 .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세계, 종종 숨쉬기가 답답해지곤 하는 한 평짜리 세계, 그리고 이야기와 음악을 통해서 내가 만들어낸 세계.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야간 아르바이트 쪽이었으며, 가장 생생한 것은 내가 만들어낸 세계였다.




***


네이버에 '환상음악단편선'이라고 검색해 보면 여전히 당시에 발표했던 웹툰과 디지털싱글 음원나온. 위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소 흑역사스러운 부이 많. 하지만 이제는 벌써 도 더 지난 작업이니 그땐 어려서 미숙했던 거라고 우겨련다. 사실은 지금도 그때와 비교하여 딱히 성장것은 아닌데.. 어쨌든 그런 걸로!


대부분 혼자 가서 조용히 공연을 하고 돌아오는 날들이었으므로 이 시절의 공연 사진은 거의 없다. 겨우 찾아낸 것도 이렇게나 저화질.
오른쪽에 보이는 화면이 직접 그렸던 웹툰을 기반으로 하여 만든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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