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길을 걸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는 각자의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저 앞 공사장 가림판에 있는 문구. 그 단순하게 지나치는 것에는 문구를 정하고자 고민하고 결재를 올리고 한두번쯤은 반려되었다가 마침내 통과되어 안도한 실무자 공무원의 사연이 있을 것이고, 그 문구를 발주받아 피곤한 눈으로 밤늦게까지 피드백을 반영하다가 원안으로 가자는 말에 화를 눌러참은 디자이너의 사연도, 그 디자인을 인쇄할 거래를 따기 위한 영업 술자리를 마치고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와 잠든 어린 딸을 바라보는 중소기업체 부장의 사연 또한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이야기들에는 한편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의 애씀이 깃들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돈을 벌고 쓰면서 이루어진다. 그 돈을 벌기 위해 고민하고, 준비하며, 기다리고, 애쓴다. 모두 벌고자 하는 애환이다. 바닥에 깔린 보도블럭도, 도로에 그려진 차선도, 정류장에 붙은 광고판도, 하물며 거리에 나뒹구는 정체모를 쓰레기까지도. 인공의 모든 것은 애쓴 결과물이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서글픈 것이기도 하다. 거리의 그 애씀들을 우리의 상상과 인지로는 단 1%도 감지하지 못할만큼 세상은 수없는 이들의 수없는 애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고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분명 개개인의 벌고자 하는 애씀은 행복하기 위한 발버둥일 것이다. 하지만 그 노력들이 산출해내는 행복의 효율은 처참하고 슬픈 것이다. 만일 이런 수율의 비즈니스가 있다면 당장에 폐기되거나 개혁당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 개혁들은 인간이 역사란 것을 시작한 이래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훨씬 적은 노력으로 훨씬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그렇게 생산성은 끝없이 성장해왔고, 높아져만 간다. 하지만 모두가 성장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여전히 영원한 혹은 평생 써먹을 행복을 확보하는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정보의 유통은 비교의 저주가 되어 사람의 마음을 좀먹고, 행복을 위한 생산성이 아닌 생산성을 위한 노력으로 길을 잃어 버렸다. 단단히 잘못된 방향의 개혁이 아닐 수 없다. 못사는 이들에 비해 얼마나 행복한가라며, 애써 순수한 이들을 가르치던 어린 시절의 교육이 길잃은 어른들의 멋쩍은 발버둥임을 그 어른이 되어서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합리주의의 정점으로 치닫는 이 세상에 아직도 종교가 성행하는 것은. 종교의 성인들, 그들은 무언가 알게 된 것일까? 아니면 자신마저도 속이면서 행복함을 찾은 것일까? 본인 말고는 알수 없을 질문들이 맴돈다. 문득 시골길에서 발견한 냉이꽃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이름도 몰랐던 그 하루살이만한 흰 꽃이 아름다웠고, 그때 느꼈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무엇이 단초일까? 여러 생각들이 가득했던 무더운 도시의 길 위였다.